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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의무면, 놀이는 권리다
공부가 의무면, 놀이는 권리다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 승인 2016.09.06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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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 중등교육의 현 체제가 짜인 것은 1970년대였다. 산업화의 수요에 따른 인력 교육이 시급했던 시절이었다. 효과는 있었다. 한국이 이 정도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그때 실행했던 교육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산업 구조가 변해 버렸는데, 교육 구조는 아직도 그대로라는 데 있다. 그런데, 내가 ‘그대로’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단적으로, 1970년대에 도입돼 이제는 뿌리를 단단히 내린 것으로 보이는 중등교육의 틀이 기본적으로 ‘도구교육’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학 입시를 좌우한다는 ‘국영수’라는 과목이 기실 도구과목에 불과하지 않은가? 남의 나라 말을 잘한다는 이유가 성공과 출세를 결정하는 우리의 현실이 우습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영어’가 도구 교육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대학에 들어온 대학생들도 ‘영어’만 잘하면 취직이 잘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구과목에 강한, 아니 더 정확히는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사람이 경쟁력을 가진 능력자라고 믿고 있는 나라는 어쩌면 한국밖에는 없을 것이다.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 나라가 총력전을 벌이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하지만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먼저, 산업구조가 이미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인건비를 기반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또한 양질의 좋은 일자리를 학교 밖에서 이미 만들어 놓고 사람을 애타게 찾는 상황도 더 이상은 아니다.

한때 그런 시절이 잠깐 있었다. 아마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에 좋은 일자리를 차지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제는 그 자리에서 밀려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둘러보라. 그들도 실은 그 시절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경쟁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도구교육의 피해를 그들 자신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도구교육’에 강한 사람이, 그러니까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앞으로 잘 살고 성공과 출세를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은 굳건하다. 망상에 불과할 뿐임에도 말이다. 그렇지만 명문 대학의 졸업장, 그러니까 동문이라는 인맥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한다.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한다(mutatis mutandis!).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면관계상, 하나만 들겠다. 교육의 당사자인 아이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의 산업구조가 앞으로도 그대로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지금의 눈앞에 보이는 산업체제에 최적화되기 위해서, 앞으로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서 헛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지금의 아이들은 두 가지 점에서 불쌍하고 특히 불행하다. 한편으로, 앞으로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서 온갖 고생을 강요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산업구조가 바뀐 지 이미 오래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특권이자 권리를 누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놀지도 못한다. 백번 양보해서 공부가 아이들의 의무라고 치자. 하지만 놀이는 그들만의 권리이자 특권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권리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경쟁력을 획득하기 몰입하기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입시체제 하에 편입된다. 그 순간부터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경쟁자이고 적이기 때문이다. ‘일등’만이 최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른 나머지는 모두 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동료를 적과 경쟁자로 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배려하며 이끌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대학들은 자랑스럽게 외친다.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사람들을 많이 모으고,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배출하는 것이 ‘글로벌 리더’를 기르는 교육이라고 말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도구교육과 입시체제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자신이 받았던 혹은 받고 있는 교육이 기본적으로는 ‘노예교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목표는 자신을 주인으로 기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아이들에 무엇을 전해주고 가르쳐야 할까? 일단 그들의 권리부터 인정해야 한다. 놀게 해줘야 한다. 친구를 돌려줘야 한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리더’로 기르고 싶으면 말이다. 그리고 공부가 그들이 해야 할 의무라면, 도구공부가 아닌 주인이 되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어쩌면, 이는 ‘도구교육’에 익숙한 지금의 부모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불안해서 실천을 못하고 있을 뿐이리라. 

한 걸음 양보하자. 기본적으로 자생 능력을 길러줘야 할 것이다. 생존은 해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입시체제에서 형성된 경쟁력이 평생의 먹거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헛힘 쓰지 말라는 소리다. 그냥 놀게 해주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놀다보면, 자생 능력보다 먼저 획득해야 능력이 생겨나기에. 다름 아닌 자기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식별력이 바로 그것인데, 이른바 자존감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이라는 식별력이 생기려면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어울리는 것 중에 제일 좋은 방식이 함께 노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상에 못쓸 물건이 독서실의 칸막이 책상일 것이다. 이것부터 치워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존감을 찾는 것, 이것이 어언 50여 년이 다 돼가도 아직도 그대로인 ‘도구교육’을 바꾸는 시작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고 있는 교육이 자신을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만드는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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