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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의 쇠우리로부터 벗어나는 윤리적 패러다임 전환 필요하다”
“현실세계의 쇠우리로부터 벗어나는 윤리적 패러다임 전환 필요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9.05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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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26강. 사회학자 정수복의 ‘조직, 윤리, 규범’

“한국인의 오래된 문화적 문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뇌관이 개인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개인 존중 사상이 없는 한 나이와 성별, 가문과 지역, 학교와 계급을 기준으로 하는 서열의식과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윤리적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사회학자 정수복의 진단이다. 지난달 2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W스테이지에서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스물여섯번째 강연은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의 ‘조직, 윤리, 규범: 윤리적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인문학적 사회학의 성찰’이었다.
정수복 박사는 “윤리적 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지낼 줄 아는 독립적인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며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고유함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줄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도덕 교육만이 아니라 문학예술을 통한 정신의 고양 그리고 숭고한 생태적 감각의 회복과 더불어 내적 힘을 키워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 정수복 박사의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한국 도덕 교육의 문제점을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국의 도덕 교육은 마치 학생들이 영원한 어린아이이기라도 한 것처럼 오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절은 가르쳐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절은 가르치지 않는다. (중략) 이처럼 윗사람의 도리와 예절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되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윗사람으로서 무례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윗사람, 아랫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개인은 인격을 지닌 고유한 존재이며 그의 존재는 감히 범할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인격과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없고 인간관계에서 상하만 따지기 때문에 무례함과 폭력이 쉽게 발생하는 것이다. 상하관계 의식과 더불어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윤리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를 쉽게 정당화한다. 여러 명이 한 사람을 따돌리고 폭력을 가하는 집단 ‘이지매’ 현상은 일본과 한국 같은 집단주의 윤리가 강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상명하복과 더불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행위 규범은 한국인의 윤리의식의 저층을 이룬다.

시장의 논리가 확대되면서 도덕이나 윤리적 차원의 문제는 접어두고 각자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기 욕망을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는 정글의 법칙이 삶의 원칙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와 규범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윤리적 차원의 회복은 가능한 것일까. 윤리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윤리적 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지낼 줄 아는 독립적인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고립된 홀로주체로 자각하는 것은 서로 주체성 실현을 위한 전제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고유함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줄 알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학교 교육에서 이뤄지고 있는 도덕교육은 애초부터 잘못돼 있다. 왜냐하면 학교 교과서의 도덕교육은 국민교육헌장의 정신을 이어 받아 “학생들에게 자기애가 아니라 이타심과 공동체에 대한 희생정신을 먼저 주입하려는 성급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비도덕적인 태도라고 비판할 뿐, 학생들에게 참된 자기사랑과 자기에 대한 긍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이나 아이들을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개인 주체로 키우지 않고 그저 남과 잘 어울리는 집단 속의 개인으로 키우기 때문에 연고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주의 윤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자기가 속해 있는 친밀한 집단 구성원과 지키는 ‘의리’를 익명의 사람들을 고려하는 보편적인 관점의 ‘정의’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흔히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라고 공격하는 데 한국사회에서는 개인 차원의 이기주의보다 연고를 중심으로 패거리를 이룬 집단 차원의 이기주의가 더 큰 문제다. “나는 나다!”라는 주장보다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강요가 더 문제다.

‘근대’의 위기와 유교 르네상스
20세기의 역사는 서구의 근대성이 세계의 곳곳으로 확산되고 침투돼 세계가 하나의 단위가 돼 가는 과정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세계가 하나의 단위가 돼가는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거의 한 세기 전 토마스 만의 시대진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하게 들려온다. 오늘날 인류는 전구지적 차원에서 세 가지 차원에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을 사용해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생산체제가 일본과 한국,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비서구권으로 확장되면서 지구의 생태적 조건 자체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태위기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면서 사회적으로도 지속 불가능한 체제로 치닫고 있다.

오늘날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윤리-동기체계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것은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로부터 나올 것이다.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이 과제는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초월적 의미체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서구문명으로부터 근대의 위기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는 작업에는 두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 비서구 문명 속에 들어있는 신분제적, 봉건적 요소들은 철저하게 걸러 내거나 재해석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서구 근대의 확장과 확산 과정이라면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비서구적 전통으로부터 지혜를 빌려와 서구적 지혜의 한계를 보완하고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구환경문제를 비롯해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전 지구적 문제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적 일국주의를 넘어서 방법론적 초국주의와 방법론적 세계주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문제는 민족국가 단위나 유럽이나 동아시아 같은 지역 단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초국적이고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한 두 가지 주의할 점을 염두에 두면서 20세기 말에 시작돼 21세기 들어서 한국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교 재해석, 또는 유교 르네상스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유교 전통으로 서구 근대의 단점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교를 어떻게 재해석해야할 것인가. 유교를 깊게 연구하지 않았지만 만용을 부려 방향을 제시해본다.

위기지학, 자기수양과 극기복례를 강조하는 유교 전통을 되살려 집단주의와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팔조목을 순차적인 과업이 아니라 동시적 과업으로 보는 것도 필요하다. 자신을 수양하고 민주적 가정을 이루고 시민사회에 참여해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고 그와 동시에 지구 전체의 수준에서 사고하며 판단하고 살아가는 세계시민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어디에도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는다. 권위주의적이고 차별적인 규범으로 작동하는 삼강오륜 특히 삼강보다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강조하는 사단을 바탕으로 하여 인의예지 등의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윤리적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성찰
한국의 윤리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현세적 물질주의 또는 경제 제일주의와 유사 가족주의라는 한국인의 삶의 태도가 문제다. 막스 베버는 문화변동을 이끄는 지식인의 역할을 ‘轉轍手’에 비유한 바 있다. 전철수가 기차가 나아갈 방향과 운행을 시작한 선로를 정하고 그쪽으로 기관차를 유도한다면 지식인은 인간, 사회, 자연, 세계, 우주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인간과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체제 내에 동화돼 체제의 순기능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 체제를  제시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윤리적 전환을 이루는 일을 스스로 담당해야할 사명으로 여기는 지식인의 책임감이 없다면 누가 윤리적 전환의 주체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지식인의 책임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이 세상 너머 존재하는 초월적 질서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에 ‘기축문명’ 또는 ‘굴대문명’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윤리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초월성과 맺어진 인간이라는 본성이 제대로 작동돼야 하며, 근대 인간이 잃어버린 ‘초월적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근대 자연과학적 합리성을 넘어서고 합리적 법체계 밑에 깔려 있는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모든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고 오로지 합리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다스릴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윤리적 패러디임 전환에 필요한 또 초월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양심의 회복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문학, 예술, 자연을 통한 심미적 체험이 중요하다. 인간은 예술적 체험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삶의 질적 도약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 체험을 통해 삶의 진부함을 넘어 초월의 세계에 접할 수 있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내적 힘을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의 쇠우리로부터 벗어나는 윤리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도덕 교육만이 아니라 문학예술을 통한 정신의 고양 그리고 숭고한 생태적 감각의 회복과 더불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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