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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지식인 망명의 원인·동기가 된 나치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책
독일 지식인 망명의 원인·동기가 된 나치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책
  • 북학 기자
  • 승인 2016.09.05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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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2.아돌프 히틀러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20세기와 더불어 ‘지식인’이 출현했다고 가정한다면, 지성사의 전 단계인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으로 이어지는 사상사를 일별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은 독일정신을 대표하는 학문이며, 독일의 자산이며, 독일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히틀러가 왜 칸트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를 사숙했고, 이에 반해 지식인들을 공개적으로 박해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서장원 교수는 독문학자다. 고려대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 독일유학을 떠나 2003년에 귀국했다. 구텐베르크-마인츠대에서 독어독문학, 철학, 독일민속학을 전공했다. 구텐베르크-마인츠대에서 17세기 독일바로크문학 연구로 독문학 석사(Magister Artium)를, 동 대학교에서 20세기 독일 망명문학 연구로 박사(Dr.phil.)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논문은 EPISTEMATA (K & N) 학술총서로 간행됐다. 귀국 후 고려대 인문대학 독일문화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2015년 정년퇴직했다. 구텐베르크-마인츠대 자비네 오버마이어교수와 공동으로 ‘독일문학 디알로그 학회 (DeLiDi)를 창립했다. 2015년 아산사회복지재단 학술연구 결과물인 『망명과 귀환이주』 (집문당)를 출판했고, 현재 한국학술협의회(대우재단) 저술사업 「토텐탄츠와 바도모리」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최근 독일문예사조 변천과정, 문명문화이론에 관심을 쏟고 있다.

<교수신문>은 2학기부터 새롭게 기획연재 ‘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을 선보인다. 이번 연재는 독문학자인 서장원 전 고려대 교수가 40회에 걸쳐 집필할 예정이다. 20세기 지성사의 한 풍경을 이룬 ‘망명 지식인’, 특히 독일 사회에서의 지식인 집단 망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지식인의 망명은 절대 권력과의 불화에서, 지성의 목소리가 체화되지 못하는 부박한 세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이 불행한 지성들이 새로운 지식의 터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질문을 이어나가고,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세기의 지적 풍경을 빚어냈는지를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독일 망명 지식인’을 만나러 떠난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잠깐 점검해 봐야 할 일이 있다. 사전 준비 없이 곧바로 망명 지식인을 만나게 되면, 지성사적 맥락의 ‘지식인 연구’가 아니라 개인사 연구로 끝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점검목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망명의 원인 및 동기다. 이에 해당하는 것이 나치 이데올로기와 나치의 문화정책이다. 독일 망명 지식인들은 학자들 간의 공개적인 학문논쟁에서 패해 조국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나치의 폭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나치 이론의 핵심인 나치 이데올로기와 나치의 문화정책이야 말로 망명의 원인 및 동기에 해당된다.
둘째 시대적 배경 및 역사적 맥락이다. 나치는 그들이 창출한 정권을 ‘국가사회주의’와 ‘제3제국’이라고 표방했다. 이에 우리는 우선 ‘제국’의 기원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유럽에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임페리움 로마눔 Imperium Romanum)’이 있었고, 이른바 동로마제국으로 불리며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던 ‘비잔티움 제국’이 395년부터 1453년까지 있었다. 참고로 ‘제국 (Imperium)’은 ‘지배하다’, ‘명령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imperare에서 기원한다. 제국이란 지배하고, 명령하고 다스리는 국가형태다.

직접 독일과 관련 된 제국의 역사를 보면 중세에서 근대 초까지 이어진―정확히는 962년부터 1806년까지―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연방체인 ‘신성로마제국’이 있었다. 그 후 독일은 1871년 독일황제제국으로 통일을 이뤘고, 이 제국은 1918년까지 존속했다. 1871년 독일이 통일해 하나의 독일제국을 이룬 것은 인류 5천년 역사에서 단지 얼마 전인 1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한 다음에 나타난 국가가 1918년부터 1933년까지 존속한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우리에게 “[독일제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유명한 바이마르 헌법의 나라, 바로 그 공화국이다.

유럽 2천년 역사는 제국의 역사였다. 20세기가 되며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하고 민주공화국이 태동했는데, 히틀러 나치정권은 민주공화국을 부정하고 ‘제3제국’을 표방했다. 제국의 전통을 이으려 했음이 분명하다. 신학적으로 볼 때 제국이란 ‘성령’이 지배하던 시대를 말한다. 낭만주의자들이 현실세계를 떠나 중세를 동경한 상황과 비슷하다. 그곳에는 영원과 평안이 있다고 믿었다. 철학적이고도 유토피아적인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제국의 역사가 그랬듯이, 제국의 본질이 그랬듯이, 히틀러 나치는 ‘성령’처럼 본인들이 지배하고 명령하고 다스리는 유토피아적인 천년제국을 꿈꾼 것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팍스 로마나 (Pax Romana)’를 기억한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평화’라는 뜻으로 대략 기원전 27년에서 기원후 180년까지 로마 제국이 전쟁을 통해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고 오랜 평화를 누리며 정치 문화적으로 지중해를 통일했던 시기를 말한다. 당시 다른 민족들이나 문화들은 단지 로마제국을 통해서만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접촉할 수 있었다. 이 지역과 이 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와 문명이 모범과 전형을 보이며 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반을 형성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고전(Classical) 고대’라고 명명한다. 로마제국은 통치를 기반으로 이렇게 문화제국을 형성했다.

히틀러 나치도 분명히 유럽 전체를 정복한 다음 ‘팍스 게르마니아(Pax Germania)’를 꿈꿨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나라이고, 학문 문화 국력 등 모든 면에서 독일은 전 세계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독일이, 독일이 모든 것 위에 있다. 세계의 모든 것 위에 있다’를 독일인들은 합창했다. 간단한 예로 노벨상이 제정되고 초반 30년 정도는 독일인들이 노벨상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전체 수상자 중 33명이 독일인이었을 때, 영국인 18명, 미국인은 6명이었다. 독일은 예술과 사상가의 나라였고, 과학과 학문의 나라였다. 독일제품과 독일식 사고는 세계를 제패했다. 1930년대 독일의 풍경이었다.
‘평화(Pax)’를 전면에 내세운 국가형태는 근·현대사 곳곳에 나타난다. 대영 제국이 식민지지배와 전 세계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며 세계를 제패해 감히 다른 나라들이 범접할 수 없게 되자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시기인 1815년에서 1914년까지를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로, 히틀러 나치 패망 후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 평화 질서를 이끈다는 미국의 정책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표기된다. 전쟁과 평화, 제국과 문화, 지배와 예속 등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이 시대 전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가 이 속에 내재해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역사적 현실은, 역사가 제시한 과제는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똑같은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데 열중하는 민족은 예속되기 마련이다. 지배하는 자는, 지배당하지 않는 자는 공부하고 관찰하고 준비하고 노력한다.

셋째 20세기와 더불어 ‘지식인’이 출현했다고 가정한다면, 지성사의 전 단계인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으로 이어지는 사상사를 일별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은 독일정신을 대표하는 학문이며, 독일의 자산이며, 독일의 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독일 사상사를 통해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고수하는 사상가들과 20세기 독일에서 등장한 지식인들이 어떠한 차이로 인간과 세상을 대면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철학적 과제와 사유의 대상이 어떠한 차이를 지니고 있고 이러한 차이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인간과 사회에 반영되고 또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히틀러가 왜 칸트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를 사숙했고, 이에 반해 지식인들을 공개적으로 박해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 ‘망명 지식인(독일편)을 찾아서’가 만날 주요 인물들△아돌프 히틀러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 이론가) △하인리히 만(작가) △안나 제거스(작가) △알프레트 되블린(작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언론인, 영화이론가) △한스 아이슬러(작곡가) △볼ㅏ터 그로피우스(건축가) △에르윈 판오프스키(예술사학자) △칼 만하임(사회학자) △히틀러에게 충성고백한 교수들 △한스 잘(지식인) △망명수학자들 △망명물리학자들 △망명 생물학자 및 화학자들 △빌헬름 황제 협회(KWG)와 자연과학자들 △망명 심리학자들 △망명 경제학자들 △망명 정치학자들 △망명 법학자들 △망명 신학자들 ※ 이 목록은 집필자인 서장원 교수의 사정에 따라 다소 바뀔 수도 있습니다.

독일철학이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부터다. “계몽은 인간 스스로 자초한 미성년상태로부터 벗어남이다. 미성년상태란 다른 사람의 이끌음 없이 그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능력을 말한다.”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Enlightenment?”, 1784)에 나오는 그 유명한 첫 구절이다. 나치를 이야기 하며 이 구절까지 인용하는 이유는 나치정권의 핵심 부서였던 ‘선전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선전부의 정식명칭은 민족계몽과 선전을 위한 제국장관부서(Reichsministerium f¨ur Volksaufkl¨arung und Propaganda)다. 나치는 민족을, 특히 유대인과 같은 저급한 인종들은 계몽시켜야 할 대상으로 봤다. 철학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돼 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칸트가 정말로 의도했던 바는 유대인이나 저급한 인종들이 아니라 교회와 도그마가 후견인 역할을 하는 사유로부터―즉 교회나 도그마에 기대지 않고는 사유할 수 없는 능력으로부터―해방되는 것이었다.

독일철학의 진수는 독일관념론이다. 독일관념론은 칸트에서 헤겔까지, 그리고 쉘링 후기 저작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정확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발간된 1781년부터 헤겔이 사망한 1831년까지를 잡는 학자들도 있다. 서양 철학의 진원지인 고대 그리스 철학과 비교해 볼 때 독일 철학이 드디어 그리스·로마를 배우고 익혀, 아니 더 나아가 극복해 독일관념론으로 서양철학사의 최고봉을 장식한 것이다. 독일관념론 철학자들로는 칸트, 헤겔을 비롯해 피히테, 쉘링이 있다. 그러한 다음 쇼펜하우어, 실증주의, 헤겔 좌파, 마르크스와 엥겔스, 신칸트학파, 니체, 딜타이 등의 19세기 독일 철학이 이어진다.

넷째 중세문학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문예사조 변천에 관한 문제와, 실증주의 정신사적 방법론 등 문예 연구방법론 변천과정이다. 나치가 괴테, 쉴러 등 독일 작가들과는 어떠한 관계였는지, 또한 실증주의 내지 모더니즘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가 망명 지식인들을 설명해주는 자료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조망하기엔 방대한 독일문학사 변천과정과 배경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단순히 중요한 목록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 나열하고 나치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책에 눈을 돌려 보기로 한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토대를 마련하고 방향을 제시한 저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투쟁』과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다. 『나의투쟁』은 히틀러가 뮌헨에서 감행한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됐을 1924년 당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즉 나치당을 재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쓴 정치 이데올로기 투쟁 저서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이력 및 세계관, 나치 이데올로기, 나치의 목적, 방법 등을 서술했다. 총 2부로 구성돼 있는데, 1925년과 1926년에 각각 발간됐다. 제1부의 1장은 ‘민족주의적 세계관’, 2장은 ‘국가사회주의 운동’으로 구성돼 있다. 제1장은 자서전적 기록과 함께 ‘정치가가 되기까지’, ‘독일노동자당’, ‘민족과 인종’ 등을 다뤘고, 제2장은 ‘세계관과 당’, ‘국가’, ‘국적 소유자와 국가의 시민’, ‘세계관과 조직’, ‘연설의 중요성’, ‘돌격대의 의미와 조직’, ‘선전과 조직’ 등이 기술돼 있다.
특이할만한 일은 바이마르공화국시대인데도 불구하고 1932년까지 제1부는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독일민족을 계몽하고, 유대인을 박멸하기 위해, 그리고 위대한 아리아인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계몽주의 칸트부터 관념론을 거쳐 19세기 니체에 이르는 독일철학을 섭렵했다. 독일의 고전주의 작가 쉴러와 관념론 철학자 피히테를 읽었고, 19세기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탐독했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국가주의’, ‘민족공동체’, ‘사회다윈주의’, ‘인종주의’, ‘유태인 배척주의’, ‘반 의회주의’, ‘지도자원리’, ‘반 마르크스주의’, ‘삶의 공간 이데올로기’, ‘반자본주의’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국가주의는 국가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나치 개념정립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국가가 개인의 가치나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너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민족과 국가가 전부’라는 것이다. 너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충성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민족은 하나, 나라는 하나, 지도자는 [유일한] 하나’라는 지도자 원리가 나온다.
“독일이, 독일이 모든 것 위에 있다. 세계의 모든 것 위에 있다”는 섬 하나를 놓고 독일령인데도 불구하고 영국이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다는 영국과 독일간의 영토분쟁시절 독일의 독문학 교수이자 애국시인인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1798-1874)이 쓴 「독일인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노래는 이후 國歌로 지정돼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제1절은 너무 국수적이라 부르지 않고, 지금은 제3절 “일치단결, 권리, 자유 / 나의 조국 독일을 위하여 (……) 꽃피어라 나의 조국 독일이여”만 국가로 지정돼 부르고 있다. 독일이 문학과 사상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철학과 문학이, 문화가 정신의 국력의 근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한 민족이 ‘국가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게 ‘민족공동체’라는 것이다. 민족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이 출발점이다. 모든 사회계층은 합심 단결해 대립을 지양하고 하나의 목표인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하고, 이는 선택이 아닌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이다. 계층 간의 장벽과 계층 간의 투쟁을 지양하고 갈등해소와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 내용이다. ‘민족공동체’ 개념은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1855-1936)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분류에서 유래한다. 민족공동체는 독일어로 Volksgemeinschaft로 ‘민족’을 의미하는 Volk와 ‘게마인샤프트’의 합성어다. 중간의 s는 합성어를 쓸 때 사용되는 문자로 합쳐져서 폭스로 발음된다.

게마인샤프트는 가족, 친척, 같은 교회신도, 민족, 시골마을처럼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이 사랑과 정으로 맺어진 사회를 말하고, 게젤샤프트는 회사, 도시, 국가, 조합, 정당 등 계약이나 협정에 의해 인위적이고 타산적인 관계로 맺어진 이익을 위해 형성된 사회다.
‘민족공동체’ 개념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각 정당에서 사용했는데, 나치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핵심개념으로 부상시켜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사용한 것이다. 퇴니스는 점차 부상하는 나치를 보며 1930년에 이미 그들을 비판한 최초의 사회학자였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정년퇴직한 교수직까지 박탈당했다. 그는 경제적 고통을 당했고, 그의 제자들과 자식들은 독일을 떠나야만했다.

사회다윈주의란 생존경쟁과 자연도태를 ‘사회진화’의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보는 것을 말하는데 나치들은 이 학설에 의거해, 인종차별, 제국주의적 침략, 파시즘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다. 이것을 나치 이데올로기로 설정한 이유는 인종적으로 나치 국가를 ‘아리안족화’해 타민족을 박멸하기 위한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나치들은 ‘소수민족’을 ‘노동노예’로 간주했다.       
의회주의와 관련해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독일적인 것이 아니고, 유태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민주적 의사형성은 ‘더럽고, 진실 되지 않은’ 것이며, 민의의 대표자들은 ‘위선적인 기회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더불어 의회주의는 무책임한 제도로 매도됐다. 다양한 의견은 거부됐고, 다수당이 존재하는 정당국가란 무시됐다. 정당이란 다만 통합된 의견을 지녀야 하며, 다양한 의견은 민족의 의지를 오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일은 지도자가 이끄는 ‘지도자 국가’가 돼야 했다. 지도자가 명령하면, 우리는 따른다는 지도자 원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30년에 발간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 역시 나치의 이론을 체계화한 대표적인 책이다. 1934년에 이미 34판을 찍었다.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는데, 제1부는 ‘가치의 투쟁’, 제2부는 ‘게르만 예술의 본질’, 제3부는 ‘다가오는 제국’으로 돼 있다. 제1부는 ‘인종과 인종영혼’, ‘사랑과 결혼’, ‘신비와 행동’의 3장으로, 제2부는 ‘인종적 아름다움 이상’, ‘의지와 충동’, ‘개인양식과 사실성양식’, ‘미적 의지’의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제3부는 ‘신화와 유형’, ‘국가와 가문’, ‘민족과 국가’, ‘북방 독일 권리’, ‘독일 민족교회와 학교’, ‘새로운 국가체계’, ‘본질의 단일성’의 7장으로 구성돼 있다.  
로젠베르크는 실질적으로 나치의 문화정책과 인종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로젠베르크는 예술은 오직 아리아인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독일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아방가르드, 야수파, 미래파를 거부하고 미국문화를 배척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 된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을 거부했다. “예술은 항상 한 특정한 피의 창조이고, 한 예술의 형식과 연관된 본질은 단지 동일한 피의 피조물에 의해 이해된다”라고 주장했다.

나치의 문화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영화는 건전한 농촌생활과 고향문화를 치켜세우는 것이었고, 회화는 건강한 여성상, 모유를 수유하는 여성,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는 풍경, 올림픽에 대한 것들이 그림으로 옮겨졌다. 음악은 베토벤과 바그너를 대표적으로 이용했다.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조형건축물이었는데, 건축물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예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점검해야 할 목록은 대충 훑어보았다. 이제 개별 독일 망명 지식인을 만나러 떠나야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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