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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의 과학적 사고력 키울 수 있다” 확신 … 척박한 연구 토양에 각성제 역할
“아동의 과학적 사고력 키울 수 있다” 확신 … 척박한 연구 토양에 각성제 역할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6.08.30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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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11. 연구의 낙수: 아동 프로젝트

인간의 성장·발달은 초기의 가정환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관심과 밀도 높고 절제된 애정과 배려가 중요하다. 어린이 교육은
부모교육과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의 발달을 촉진하는 환경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그런 환경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이라고 한다면서요?”
내가 미국에 유학 간 첫 학기, 대학원의 발달이론 세미나 시간.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한국을 다녀갔다는 교수가 한 이 말을 듣고 학생들이 ‘와아’ 하고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엉겁결에 나는 짧은 영어에 변변히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 시간을 마쳤다. 나도 할 말이 있어 ‘반격’의 준비를 했다. 다음 주 세미나 시간이 시작하자마자 나는 손을 들었다.

“교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In Korea(힘줘 말했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이라고 하는데 당신네 미국에서는 0살이라고 합디다. 나는 Korea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생활하다가 태어나면 한 살이라고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인들은 엄마 뱃속에서의 아이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성장·발달 환경이 胎內냐 胎外냐의 차이일 뿐, 그가 어디서 컸든 그것을 왜 무시하는 겁니까?”
한국에서 묘한 사람이 왔다고 생각했던지 웅성웅성하던 강의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용기백배, 태교가 어떻고 하다가 강의가 끝나고 말았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엄마의 말을 듣고 모차르트의 교향곡 「쥬피터」를 듣는다고 하지 않는가. 태내든 태외든 환경은 아이의 발달에 엄청나게 중요하다.

아동에 대한 나의 관심
나는 미국에서 아동 관련 공부를 한 뒤 공인 임상심리학자로서 한 아동병원에서 5년간 일한 적이 있다. 나의 아동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싹튼 셈이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의 아동 프로젝트는 연구소 설립 때부터 핵심적 연구영역의 하나로서 연구소에서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수행한 프로젝트였다. 내가 1970년에 연구소에 왔을 때, 아동연구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다. 내가 온 뒤 문교부가 지원한 유아교육 관련 자료의 연구개발, UNICEF가 지원한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가정교육 프로젝트, 그리고 30여년 동안 진행한 한국인 성장·발달의 종단적 추적연구 등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가 많았다. 1972년부터 시작한 아동상담실 활동과 행동수정기법의 보급도 KIRBS의 아동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아동 관련 연구는 내가 연구소에 있는 동안 「리서치 블레틴」과 「리서치 노트」에 발표한 논문이 60여 편을 비롯해 종단적 연구 관련 논문, <아동발달>이라는 월간지, 아동 관련 뉴스레터 등 모두 합치면 줄잡아 일백 가지를 넘는다.

연구소는 초기부터 아동연구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1976년에 ‘국가발전과 어린이’ 세미나(서울 어린이회관 지원)와 1977년 ‘내일의 한국과 오늘의 어린이’(문교부 지원)라는 아동교육 자료의 연구·개발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들어갔다.
1970년을 전후해서 문교부는 유아교육의 敎育課程에 관심을 보이다가 그 이후 UNICEF와 함께 KIRBS의 아동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80년대의 약 10년 동안 유아교육자료, 유치원 교사용 지도서, 1종도서(유아교육 관련 각종 도서 및 자료) 등의 연구·개발을 KIRBS에 위촉했다. 문교부의 KIRBS에 대한 재정적·행정적 지원도 상당했다.

UNICEF는 우리가 아동 프로젝트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을 때 1980년 초기부터 한국의 저소득층 아동의 조기교육과 부모교육에 대해 문교부와 협조하면서 KIRBS의 아동 프로젝트에 장기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했다. 문교부는 유아교육과정을 수정·보완할 필요가 있었고, UNICEF는 한국에서의 원조사업을 계속 추진해야 할 처지였다. 문교부와 UNICEF는 이 일을 차질 없이 협조하면서 수행할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이때 아동 프로젝트를 전문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KIRBS가 적시에 참여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세 기관이 쉽게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에 참여하면서 내가 맡은 일의 부담도 커가고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봄·여름 방학을 이용해 아태지역의 아동연구 자원인사로, 여러 국가를 돌면서 분주하게 자문활동을 하게 됐다.

아동의 과학적 사고력 개발
KIRBS의 아동 프로젝트는 크게 아동 관련 연구, 아동 교육, 그리고 자료개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동 관련 연구활동은 유아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시행의 근거가 될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조사연구가 많았다. 과거 국내에서 발표한 연구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연구가 필요해서 우리 스스로 독자적인 디자인에 따라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의 조사연구 예를 들면, 유아교육의 현황과 문제점 조사, 어린이집의 시설·설비 및 운영 실태조사, 부모교육 프로그램의 요구조사 등이었다. 이런 연구들은 KIRBS의 아동 프로젝트를 떠받쳐 주는 자료를 제공해줬다.

조사연구에 더해 우리는 우리가 개발한 각종 프로그램, 자료 및 도구들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한 준실험연구(疑似實驗硏究)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유아교육과 부모교육 프로그램 등 각종 크고 작은 프로그램의 수정과 보완에 활용했다.
실험연구의 예는 아동의 과학적 사고력 개발연구를 들 수 있다. 이 연구에서 과학적 사고력의 개발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나중에 아동의 지능개발 도구제작의 근거가 됐다. 실례로 3~5세 유아를 위한 지능개발프로그램을 제작해 약 한달 간 실시한 결과, 실험집단이 통제집단(비교집단)보다 IQ상으로 10점 이상 향상한 것을 발견했다. 유치원 교육 경험이 장차의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등도 실시했다. 요점은 간단하다. 유아의 지적발달은 유아기에 의도적 노력으로 개발·촉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KIRBS의 아동 프로젝트의 두 번째 영역은 아동 교육과 관련된다. 유아교육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 토대가 출생 후 몇 년 안에 ‘많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연구와 이론은 많다.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각인현상이 출생 직후의 어떤 결정적 시점에 나타난다고 봤다. 프로이트나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등 정신분석학자는 情意的 특성이 출생 초기에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벤자민 블룸(B. Bloom) 교수는 지능은 4세쯤에 그 50%정도가 성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범모 교수는 인간발달의 원칙을 교육적 경고에 관한 시사점을 담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그것은 基礎性(초석이 튼튼해야 한다), 適期性(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累積性(어릴 때 것이 세월이 갈수록 쌓이고 쌓인다), 그리고 不可逆性(한번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다)의 원칙이다. 인간발달의 핵심에 이런 연구와 이론 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성장·발달은 초기의 가정환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관심과 밀도 높고 절제된 애정과 배려가 중요하다. 어린이 교육은 부모교육과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의 발달을 촉진하는 환경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그런 환경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자녀교육은 중요하고 어렵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교육 전문가가 돼야 하고 ‘부모자격증’을 가져야 한다고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1970년에 그의 책 『미래의 충격』에서 말하기도 했다.

유니세프 지원 받은 ‘부모교육 프로그램’
우리가 개발한 부모교육 프로그램은 나중에 UNICEF 지원으로 교육적 환경이 열악한 전국 벽지 지역의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시범유아원의 부모교육에 투입한 프로그램이었다.
KIRBS의 아동 프로젝트의 세 번째 활동은 이 프로젝트에 투입할 각종 자료의 개발이다. 당시 문교부의 위촉으로 진행했던 각종 자료 개발은 앞에서 언급한대로다. 우리가 개발한 교육자료 등은 금방 시중 출판사의 주의를 끌었다. 이들은 각종 유아교육 관련 자료의 저작을 연구소에 요청해왔다. 요청한 저작물 계획을 놓고 우리는 꼼꼼하게 검토, 평가, 판단하면서 주문에 응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착수한 교육자료 개발 활동 가운데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든 일이 하나 있다. 아동용 교육 장난감 제작이다. 아동 프로젝트 초기에 진행한 아동의 과학적 사고력 개발이 가능하다는 결과에 고무돼 그때 사용한 試作 장난감을 시발점으로 해서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그것이 1972년경이었다. 우리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장난감 금형을 만들고 시제품을 찍어냈다. 우리의 아이디어가 장난감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모두들 흥분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3년이었다. 중동에서 석유파동이 불어 닥쳐 장난감 원료인 플라스틱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겨울철에 연구소에 난로를 피울 걱정을 해야 할 때 플라스틱으로 장난감 생산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못내 아쉽지만 장난감 제작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장난감 제작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전력을 쏟아 부었던 홍기형 선생은 그 일에서 손을 떼게 됐을 때,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홍기형 박사였다. 장난감 원형의 효과검증 연구에 그의 이름이 한 저자로 기록되는 것이 온당한 데도 그는 자기는 장난감 제작만 한다면서 연구논문에 자신의 이름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전혀 서운한 빛을 내보이지 않았다.

어린이가 나라의 미래이기에
한국행동과혁연구소와 같은 종합 사회과학 연구소가 발족할 때는 사회와 학계가 주목할 만한 그럴듯한 일, 눈에 띄는 일을 한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 유리하다. 학술적으로 논쟁거리가 돼 있는 문제나 사회적으로 절박한 이슈가 돼 있는 프로젝트를 내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KIRBS가 출범할 때의 가족계획 연구나 완전학습 연구는 당시로서는 주목을 끌만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아동연구는 ‘여성들만의’, ‘가정적인’ 관심사이지 종합 사회과학 연구소가 굳이 관여할 만한 일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KIRBS가 발족하면서 연구소의 전체 연구 프로그램의 하나로 아동연구를 내세운 것은 어떤 면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자고 작심하고 나선 것은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요 미래라는 등의 구두선에 흥분해서 한 일이 결코 아니다. 아동 연구와 교육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뛰어든 것이다. 연구소 설립자의 확신과 원대한 비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에는 아동에 대한 체계적·과학적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기관이 없었다. 아동연구는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했던 일이었지만, 대학의 관련 학과가 처한 연구 환경 등 여건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럴 때 KIRBS의 아동 프로젝트는 불모의 아동연구토양에 작으나마 각성제 구실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 아동발달의 종단적 연구와 UNICEF 지원의 가정중심교육 프로젝트, 그리고 아동상담실의 활동 등에 대해 그 전말을 상세히 적을 것이다. 이런 활동도 KIRBS 아동 프로젝트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우리가 애썼던 일이었다.
아이의 生得的 DNA가 무엇이든 그가 어릴 때 부모가 만들어 주는 환경은 그의 성장과 발달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營養素의 원천이다. 빈번히 언급되는 ‘교육적 환경’이라는 말은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이를 신체적으로 튼튼하고 지적으로 영특하고 성격적으로 올곧게 키워준다. 커서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된 사람’인지 어떨지는 어릴 때의 환경이 결정한다.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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