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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명의 肉聲 … 역사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났을 때
500여 명의 肉聲 … 역사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났을 때
  • 정선태 국민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6.08.30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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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쇼와 육군』 호사카 마야야스 지음|정선태 옮김|글항아리|1,136쪽|54,000원

 

이 책의 핵심은 ‘짐승의 시간’을 보내며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병사들의 육성이 도드라지는 제2부다. 이른바 ‘공식 戰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생생한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이 목소리들이 전하는 진실은 전쟁을 고급군인이나 관료의 시선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동원돼야 했던 일반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의 원제목은 ‘쇼와 육군 연구’. 조금은 무미건조한 제목이다. 그런데 번역 의뢰를 받은 후 읽어보고는 저자의 ‘연구 방식’에 깊이 공감했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했다.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손꼽히는 저자의 집요하고 끈기 있는 탐색은 내밀한 지점까지 파고든다. 그리고 오랜 세월 공식적인 기록이 은폐해왔던 다양한 목소리들은 하나씩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建軍에서 다이쇼 말기에 이르는 시기의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로 이어지는 고급군인 양성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쇼와 육군의 비극은 이 시기에 이미 싹텄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제2부에서는 음모, 착오, 모략, 파벌투쟁, 무모한 전쟁 지도 등 헛된 명예욕과 망상에 사로잡혀 수많은 사람들을 ‘짐승의 시간’으로 몰아넣었던 쇼와 육군의 고급군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이른바 전후 처리와 관련한 문제들을 조목조목 들춰낸다.

독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핵심은 ‘짐승의 시간’을 보내며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병사들의 육성이 도드라지는 제2부다. 중일전쟁 당시 잔학행위에 가담했던 어느 병사의 고백,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참담한 최후에 대한 진술,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둘러싼 웃지못할 사건 등 이른바 ‘공식 戰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이 목소리들이 전하는 진실은 전쟁을 고급군인이나 관료의 시선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동원돼야 했던 일반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듣고 쓰기’라는 방법론 덕분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초조해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전쟁 체험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괴로움과 슬픔을 나누면서 그들이 마음 속 깊이 감춰둬야 했던 이야기들을 끌어낸다. 이것이야말로 서재에 틀어박혀서는 전혀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겠는가. 역사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사람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기술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저자의 역사관인 듯하다. 물론 공식 간행된 기록들을 참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공식 간행물과 私家版 간행물을 두루 참조하면서도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을 취재하고 그 목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법은 이른바 ‘엄격한 역사학자’의 눈에는 뭔가 엉성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엄격한 태도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객관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있는 그대로’보다 ‘들은 그대로’ 또는 ‘읽은 그대로’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엄격한 태도란 자신이 읽거나, 보거나, 들은 것을 가감 없이 냉정하게 서술하려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며, 객관적이라는 것조차도 ‘상대적 객관성’을 염두에 둬야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자이기 이전에 독자로서 나는 저자의 역사관에 동의한다. 공식적인 기록에만 기대는 역사 서술, 특히 동시대사 서술은 한계가 분명하다(이는 한국전쟁사는 물론이고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결절점이었던 4·3사건이나 광주민주화운동 등등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다양한 육성을 모아놓은 자료들을 떠올려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그가 발로 뛰며 ‘듣고 쓰기’ 방법론을 견지한 것도 동시대사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싶어서였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고급 군인의 맹목성과 광기에 희생된 이들의 상처 입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천황을 등에 업고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한 지도자들의 탐욕과 무능과 거짓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역사와 문학(특히 소설)을 구별하지 못하는 순진한 태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줄 안다. 이 자리에서 길게 말할 수는 없으나, 역사와 문학이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둘의 친연성은 생각보다 깊다. 문학적 상상력을 결여한 역사는 무미건조할 뿐만 아니라 독자를 진실의 자장으로 끌어들이는 호소력을 얻기도 어렵다(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는 다르겠지만).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오랜 기간 수백 명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논픽션 형식으로 쓴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융합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사례들을 보건대, 둘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역사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나고 문학이 역사적 상상력과 만나는 지점을 탐색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쇼와 육군의 이면을 파헤친 이 책이 이른바 ‘비사’나 ‘야사’와 구별되는 것은 전쟁을 체험한 수백 명의 육성을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육성들이 설득력 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역사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나는 지점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전 병사의 고통스런 기억을 실마리로 하여 참모본부와 대본영 그리고 皇居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이 책은 전쟁사뿐만 아니라 역사 일반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하나의 의미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물론 아쉬움도 없지 않다. A급 전범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은 물론 천황의 책임까지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면서도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피해국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자칫 사실 기술로 일관하기 쉬운 전쟁사를 병사와 고급군인을 두 축으로 하여 근현대 일본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눈이 날카로운 독자라면 滿蒙 지역에서 인도와 남태평양까지를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쇼와 육군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고급 군인과 관료들이 자본과 결탁해 무슨 짓을 저지를 것인지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비춰 미래를 통찰하는 힘이야말로 좋은 역사서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터, 『쇼와 육군』도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정선태 국민대·국어국문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한국 근대문학의 수렴과 발산』,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등을 썼으며, 『동양적 근대의 창출』, 『가네코 후미코』, 『도조 히데키』, 『기타 잇키』(공역)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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