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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새로울 건 없지만 되새길 문제들
전혀 새로울 건 없지만 되새길 문제들
  • 북학 기자
  • 승인 2016.08.30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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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컬럼비아대 교수가 던진 질문, ‘왜 대학에 가는가’

이 글은 앤드루 델반코 컬럼비아대 교수(영문과)의 신간 『왜 대학에 가는가』(이재희 옮김, 문학동네, 2016) 중 일부를 발췌·요약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학의 윤리적 상황을 일별해봄으로써 우리는 (일류대학을 필두로 해서)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에 대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 가지는, 많은 대학들이 특히 서열의 상위권에 있는 대학들이 돈의 세계에 너무 가까이 가고 말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명문대의 지도자들이 보수가 짭짤한 기업 이사회 자리에 앉아 그들의 총장 연봉에 웃고명을 얻는 것은 흔한 일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교수들은 어떨까? 엘리트 학계 바깥에 있는 많은 대학의 교원들은 낮은 보수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학생들에게 헌신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름있는 교수들에 가려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여기서 이름 있는 교수란 아스펜에서 다보스까지 제트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TV에 나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고, 자기가 속한 대학에 시간보다는 이름값을 더 많이 제공하는 미디어스타 교수들을 말한다.
20년 전 하버드대 교수들에게 보낸 한 학장의 보고서에서 헨리 로조브스키는 이렇게 썼다. “하버드대 교수사회는 대체로 규칙이 없는 곳이 됐다. 혹은 살짝 다르게 말하면 종신교수들이, 종종 개인적으로 자기만의 규칙을 정하는 곳이 됐다.”

여기서 규칙이란 강의시수, 외부활동, 상담과 시간 비율 같은 것을 말한다. 로조브스키 학장은 교수들의 ‘나 중심 기질’이 “교수의 일차적 의무는 대학(본질적으로 학생과 동료)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이라는 역사가 오랜 시민적 태도의 흔적을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로부터 5년 후, 스탠퍼드대 전임 총장 도널드 케네디는 그의 저서 『학계의 의무』(1977)에서 학문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여 설명했다. 그러나 적확하고도 유익한 이런 종류의 비판은 유감스럽게도 대학교수 전부를 이기적이고 무분별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대중이 교수집단에 의구심을 갖게 된 한 가지 이유는 기업 투자자들과 정부기관들 사이에 ‘기술 이전’ 형태의 협업이 증가하면서 좋은 자리에 있는(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 과학 분야에 있는) 교수들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대학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 공적자금으로 개발한 연구결과나 치료법 등을 통한 수익을 해당 대학과 개인이 나눠 가질 수 있게 한 ‘베이비돌법(Baby Dole Act)’이 제정된 이래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순수연구’와 ‘응용연구’의 구분이 예전처럼 뚜렷하지 않게 되면서 자문과 공동연구의 경계도 모호해진 상황이다.

여러 일류 경제학자들은 정부당국이 투자사, 보험사와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도록 돕고 있는데, 이들 투자사나 보험사는 바로 그 경제학자들이 체계화한 규제와 조세정책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일반화는 모든 대학에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 학생들은 문학이나 예술 같은 ‘쓸모없는’ 과목에서 몰려나와 경제학 같은 ‘시장성 있는’ 과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지금도 그런 이동은 계속되고 있는데 많은 학생들은 실제로 무엇이 무엇에 이로운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다.

학생들이 졸업 후 미래를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명문대도 예외는 아니다. 젊은이들은 이런저런 직업을 구하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인지, 배우자와 만족스러운 직장은 어떻게 찾는지, 어떻게 성공하고 그 성공을 유지하는지, 욕구와 결핍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와 같은, 간단히 말해 오랜 세월 유효성이 증명된 삶을 꾸려가는 방식들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안다.
불행히도 많은 대학들은 좋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베풀며 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지 못함으로써, 불안에 나포된 학생들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 나온 대학들』(2003)이라는 시의적절한 제목의 저서에서 하버드대 전임 총장 데릭 복은 젠크스와 리스먼의 논평을 거의 똑같이 반복했다.
“교수들은 오늘날 학부생들을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한때 교양교육의 기본목표라 일컬어지던 과제였으며,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인데도 말이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 문장들을 각주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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