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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급한 감식안으로 ‘호림금관’을 흠집내는가?
누가 저급한 감식안으로 ‘호림금관’을 흠집내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6.08.2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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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37. 신라금관의 신례 (新羅金冠의 新例)

 

 

▲ 사진① 신라금관, 높이22cm (호림박물관 소장)

어떤 전공자는 ‘實見調査’도 없이
저급한 감식안으로 湖林金冠의 眞僞與否
가 불투명하다고 대중에게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으며 국보급문화재를 흠집 내고 있다.

 

 

▲ 사진⑤ 신라금동용두(단국대박물관 소장)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림박물관은 우리나라 사립박물관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수십 점에 이르며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흩어진 유물들을 수집해 체계적인 학술의 장으로 편입시킨 공로가 크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단체에서 경비와 노력을 들여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金冠은 모두 10점으로 고구려금관 1점(일제강점기 전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출토, 개인소장), 가야금관 2점(이건희 소장,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신라금관 7점(교동출토 금관, 서봉총금관, 천마총금관, 황남대총금관, 금령총금관, 금관총금관, 호림박물관 금관)이다. 백제의 금관은 아직 알려진 유물이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나주 신촌리에서 출토된 완벽한 형태의 金銅冠(사진 ⑮)으로 미뤄보아 백제금관의 존재가능성도 커진다. 현존하는 금관이 없다고 하여 백제인들이 금관을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라의 무덤과는 다르게 고구려와 백제의 무덤은 盜掘이 쉽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1천600여년 전에 제작된 극소수의 금관이 도굴당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을 확률은 매우 낮다.

사진 ①②③은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신라금관이다. 이 금관은 우리나라 금관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보배로운 문화재다. 신라금관의 초기 형태를 밝혀주고 금관제작기법의 중요한 측면을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기존 신라금관 제작기법의 방법과는 또 다른 형식으로 신라금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열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금관은 달개장식의 이음방법, 세움장식의 고정방법, 뒷부분의 특이한 세움장식 등으로 이미 알려진 신라 초기금관인 경주 교동출토 금관(사진 4)과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신라금관의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논문(「삼국시대 금관의 재조명」, <동아세아 역사문화논총>, 2014)에서 신라금관 세움장식(Y字形, 出字形)의 의미에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신라금관의 세움장식은 나뭇가지가 아닌 정면에서 바라본 용의 뿔[龍角]을 형상화한 것으로 절대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증거 유물로는 양양 진전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용두(사진 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용두(사진 ⑥),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이수부분의 용(사진 ⑦), 신라 용면판와당(사진 8), 고려청자의 용두(사진 ⑨)등이 있으며, 龍의 뿔이 모두 외뿔이고 Y字형으로 벌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초기 Y字형태의 세움장식에서 出字형태의 세움장식으로 變貌하는 신라금관의 세움장식은 정면에서 바라본 용의 뿔[龍角]을 형상화시킨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호림박물관이 소장한 신라금관은(이하 ‘湖林金冠’) 용의 뿔[龍角]을 정면에서 본 형상으로 경주 교동출토 금관(5세기전반)보다도 더 古式이다. Y字형태의 세움장식은 금관테를 수평으로 두 줄을 잘라 끼워서 교동출토 금관(리벳고정)보다는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금관테에는 달개장식을 달지 않아 깔끔하다. 금관테나 세움장식의 가장자리에는 교동출토 금관처럼 打點列文이 없으며 뿔의 끝부분은 몽오리도 생성되지 않았고 단순하다. 교동출토 금관은 1단이고 3개의 세움장식이 있는데 湖林金冠은 2개의 세움장식으로 앞면에 2단의 뿔을 형상화시킨 세움장식과 머리 뒷부분의 결구에 작은 세움장식(처음 뿔이 생성되는 뿔의 몽오리 모습을 형상화시킨 것으로 보임)을 달았다(사진 ⑩). 달개장식을 연결한 金絲는 다른 금관의 金絲보다 두 배정도 굵어서 몸통과 달개를 관통해 한번만 오므렸으며 네 곳의 뿔 끝부분에 있는 달개만 꼬았다. 달개장식은 한 쌍씩 30개가 달려있던 것으로 보이고 2개는 유실돼 28개가 남아있다. 달개장식의 이음방식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조익형관식(보물 제630호)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제조익형관식(보물 제617호)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선행하는 방식이고 한 줄의 金絲에 달개장식을 두 개씩 매다는 특이성을 보인다(사진 ⑪).

20K 정도의 金版을 제작해 금관테와 세움장식을 오려낸 후 절단면도 마감처리를 곱게 했다. 금관 뒷부분의 이음부분은 세로로 구멍을 두 개 내어 작은 세움장식을 덧대어 金絲로 이어 붙였는데 세로로 구멍을 내어 金絲로 묶는 이음방식은 고구려금관, 가야금관, 신라금관에 고루 나타난다.(사진 ⑫) 
이 湖林金冠은 교동출토 금관(사진4), 부산 복천동출토 金銅冠(사진13)과 더불어 초기 신라금관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이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최초의 신라금관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전공자는 ‘實見調査’도 없이 저급한 감식안으로 湖林金冠의 眞僞與否가 불투명하다고 대중에게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으며 국보급 문화재를 흠집 내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그런 사람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문화재 관련 공기관에 간부직원으로 소속돼 있다는 것이다. 점입가경으로 그는 박선희 상명대 교수가 논문으로 발표(「신라금관에 선행한 고구려금관의 발전양상과 금관의 주체」, <백산학보>, 2011)한 고구려금관(사진 ⑭)도 역시 ‘遺物의 實見’도 없이 가짜라고 무책임한 발언을 하고 다닌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편승하는 논리로 “고구려에는 金銅冠만있고 金冠은 없다”라는 것이다.

어느 전공자든 자신과 다른 의견을 주장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유물의 진위를 말할 때는 반드시 ‘遺物의 實見’이 선행돼야 하고 실견도 하지 못한 유물에 대해 경박하게 대중에게 眞僞를 운운하는 것은 공직자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문화재를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조차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다. 진정한 학자는 말보다 글로써 자기 주장과 논리를 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학자는 아니지만, 문화재관련 공기관에 소속된 공직자로서 새로운 문화재를 찾아내어 바르게 연구하고 보호하고 국민에게 알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문화재 흠집 내기에 앞장서고 있으니 보기 민망하다. 더 이상 국보급 문화재를 흠집 내는 행동은 삼가해야하고 처신을 신중히 해야 한다.
1천600여년을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잘 버텨온 국보급 문화재를 경박한 전공자 한 명이 가짜로 전락시킬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역사의 진리가 선조의 유물 속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異見이 있으면 論文으로 발표하면 될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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