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10-14 17:21 (월)
짙은 백야
짙은 백야
  • 교수신문
  • 승인 2016.08.16 16: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달의 詩

짙은 백야

                                

이윤학

 

화단을 지키는 고양이 밥그릇에다
성견 사료 한 알 한 알 떨어뜨려줬더니
골아 났는지 눈길도 주지 않더라

마름모꼴 방 끝의 티브이를 켰더니
화면 중심으로 불 꺼진 성냥골이
쏜살같이 떨어지더라

백합이 품은 짙은 백야를
필사적으로 걸어온 자
물소리를 틀어놓고
자갈을 뒤집는 잠이 들었다

한 번은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최후의 툰드라를 틀어놓고
잠이 들어버린 자
바가지에 틀니를 벗어놓고
옛날 맛 그대로인 김치 씹은 물을 오물거렸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딱따구리조각마법사
세 시 반의 맨발을 위해
오동나무 상판에 가로의 숨구멍을 뚫었다

카페의 목조계단은 비좁았고, 반들거렸다
음울한 클래식이 지름길로 들어오고 나갔다
그만이 무덤에 갔다 돌아왔다
짙은 백야를 걸었다

천년만년 본드를 흡입하고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갔다
죽은 자의 힘을 빌려 살지 않겠다
냉골 바닥 거대한 십자가 앞에 평개치며
떨거지가 되지 않겠다

―『짙은 백야』(문학과지성사, 127쪽, 8,000원, 2016.7)

 

김수영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 이윤학의 아홉 번째 시집 『짙은 백야』가 출간됐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나온 이후 그는 “생의 결핍을 성찰적 시선 안으로 끌어들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특유의 방식”을 제시해왔다.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그런 특유의 방식에 어떤 깊이까지를 더했다. 1965년 홍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먼지의 집』,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