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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을 먹는 환희 또는 서걱거리는 말의 여운
미역국을 먹는 환희 또는 서걱거리는 말의 여운
  • 교수신문
  • 승인 2016.08.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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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 김상환 지음|북코리아|400쪽|20,000원

 누구보다 모더니즘을 갈망했지만,시인은 전통을 헌신짝 버리듯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 문화의 낙후성은 시인에게 욕망의
원천이자, 사랑의 원천이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우리의 歷史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歡喜를 (「미역국」, 1연 첫 부분)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고, 『밝은 방』은 사진 이론사에 굵은 일획을 남겼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대개 그 분야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하물며 시대를 가를 만큼의 영향력을 미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바로 그 불가능의 성취를 통해 바르트는 자신의 지적 희귀성을 입증해 냈다. 그렇다면 ‘한국 철학계의 바르트’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큰 주저 없이 김상환을 꼽을 것이다. 그는 석박사 학위논문을 데카르트로 시작했으나, 고대 그리스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프랑스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해체주의 등등을 종횡무진, 아주 가뿐하게 넘나들었다. 존재론에서 미학으로 향하더니만 어느덧 문학에 머물었고, 이제는 윤리학과 동양철학에 진입했다.

물론 누구나 이런 모험을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발 딛는 곳마다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일은 결코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바르트처럼 김상환은 稀·貴한 사례에 속한다. 과연 어떤 철학 전문가가 김상환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데리다, 들뢰즈 등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번에 출간된 『공자의 생활난』도 어김없다. 과연 어느 누가 김상환의 김수영과 공자를 무시할 수 있을까? 외면과 무시는커녕, 훌쩍 상향조정된 담론 수준에서 그의 해석과 아이디어를 무겁게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이번 책에서 김상환은 동서의 지성을 교배하여, 플라톤 식 “영혼의 자식”을 낳았다. 아마도 산고가 심했을 것이다. 간난아이의 운명과 숨겨진 잠재성이 어떻게, 얼마만큼 발현될 지는 아직 미정이다. 허나 아이 걱정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김상환은 진한 미역국을 먹고 빨리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서융합의 새로운 서막을 축하하며 미역국을 나누어 먹자. 융숭한 환희가 함께할 것이다.

이 글은 ‘미역국을 먹는 환희’에 관한 글이다. 나는 김상환의 글을 ‘엄정하게’ 논평할 깜냥은 못된다. 다른 무엇보다, 그에 필적할만한 동서철학에 대한 깊은 혜안이 없다. 다만 나는 김수영의 「미역국」과 김상환의 해석을 잇는 팽팽한 ‘끈’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끈의 미묘한 울림에 공명했던 상념 몇 가지를 되도록 명징하게 기록할 것이다. 이런 연유로 「미역국」에 등장하는 4가지 소리를 글의 실마리로 삼을 것이다.

1. 결혼의 소리

人生도 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 5연)

시인의 증언을 토대로, 김상환은 「미역국」을(시인이 사고로 죽기 3년 전의 작품) “진정한 처녀작”으로 꼽는다. 詩作의 始作은 언제나 끝과 전체를 함축하고, 결국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김상환의 논지에 따르면, 시에 등장하는 미역은 고리타분한 과거의 공자를, 미역국에 뜬 기름은 시인이 전유한 미래의 공자를 가리킨다. 그는 「미역국」의 前後에 걸쳐 있는 김수영의 수많은 시편들에서 공자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래서 이 책, 『공자의 생활난』은 공자를 통한 새로운 김수영론이자, 시인의 상상력과 저자 자신의 사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일신한 공자론이기도 하다. 전대미문의 김수영론과 공자론, 이것이 이 책이 설정한 기본 과제다. 그리고 이 과제를 반복적으로(그리하여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덤으로 열리는 세계, 즉 “동서 문화를 포괄하는 제3의 교양의 세계”가 글의 최종 목적지다.

기존의 김수영 연구는 크게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양축의 방향으로 갈린다. 1981년에 제정된 김수영 문학상이 제1회 수상자로 리얼리즘 계열의 정희성을, 다음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이성복을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철학자는 엉뚱하게도 유가적 전통에서 시인을 재조명한다. 안개에 시나브로 옷이 젖듯, 부지불식간에 전통에 영향을 받은 정도가 아니다. 김수영은 전통을 배격하는 통상의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역사적 전통을 “긍정”하는 모더니스트다. 대개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실천을 역설할 때마다 그들의 말에서 유가적 어조가 묻어나듯이,1) 저항적 참여시를 짓기 한참 이전부터 김수영은 공자, 퇴계, 다산, 그리고 송시열과 김성일의 ‘선비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김수영에만 한정된 모습은 아니다. 첫 시집으로 『답청』을 낸 정희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성복의 글에도2) 유가의 전통이 역력하다. 어찌 보면, 공자를 통한 김수영 해석은 우리 학계가 짊어져야만 하는 불가피한 연구 과제였다. 다만 전통의 엄청난 규모 때문에, 아니면 서양인들이 미역에 구역질하듯 악취의 온상지로 전통을 바라보는 모던 숭배의 시선 때문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과제일 뿐이다.

시인은 “人生도 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이는 것을 '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김상환은 결혼의 소리를 “사랑의 소리”로, “온몸을 통한 온몸의 움직임에서 울리는 소리”로 해석한다. 이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고안해낸 전문용어, “원격감응”과 “잉여 수반적 반복”의 논리를 숙지해야 할 것 같다. 원격감응이란 미지의 먼 곳으로부터 전해오는 메시지에 호응하는 교감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時空의 간극을 뛰어넘어 서로 어우러져 감응할 수 있는 사랑의 호응 작용이다. 이런 사랑의 작용으로 줄탁동시(啐啄同時), 즉 서로를 가로막는 알껍데기 안팎에서 새끼 새와 어미 새가 벌이는 부리의 화답을 떠올릴 수 있다. 메를로퐁티의 ‘세계의 살’, 노장의 ‘천망’, 불가의 ‘연기’, 화엄종의 ‘사사무애’ 등과도 유사한 개념이다. 또한 시인이 “시에 대한 思惟”로서 언급했던 “모호성”과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3) 을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모든 것들은 촘촘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멀리서 출렁이는 파동이 모호하게 지연된 채로 감지된다. 우리는 그 떨림에 반응하여 호응할 수 있다. 김상환은 감응을 크게 대타감응, 자기감응, 원격감응 세 가지로 구분한다. 들뢰즈에 기대어 대타감응은 현재적 종합, 자기감응은 과거 기억의 종합, 원격감응은 미래의 종합이라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또 같이하듯이, 무한대의 혼돈에 대한 모호한 豫感인 원격감응은 대타감응을 확장시키고 자기감응을 심화시킨다.

반면 잉여 수반적 반복은 사랑의 방법(길)이자 존재방식이다. 사랑이란 특수하고 구체적인 행위 모델의 반복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창발적 잉여다. 김상환은 이 사태를 공자의 인(사랑)과 예의 관계로 설명한다. “인은 사람들이 사회적 삶 속에서 예를 수행하는 가운데 절정의 순간을 맞아 꽃처럼 피어나는 어떤 ‘마술적인 힘’이다.” 사랑이란 거듭 반복되는 儀式이 정서적 특이점을 통과하면서 수반하는 잉여의 힘이다. 사랑은 내면 깊은 곳에 혹은 천상의 저편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정성을 다해 장만한 일상의 음식에 담겨있다. 시인의 어법으로 말하면, “사랑의 음식이 사랑”4) 이다. 이런 점에서 정성어린 미역국 한 사발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處所다.

인생 航路는 한 개체의 삶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움직’이고, 더 나아가 인간 아닌 뭇 생명들과의 강고한 사슬로 엮여 ‘통째로’ 움직인다. 나의 생명은 우글거리는 장내 미생물들과도 초신성의 폭발물과도 접속되어 있다. 그렇기에 생의 원격감응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랑은 이런 원격감응의 가능조건이다. 뼈 속까지 절절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그 원거리 감응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의 사랑은 한갓 낭만적인 정념도 호르몬 작용도 아니다. 차라리 결혼이라는 禮를 무한반복 절차탁마함으로써 가까스로 얻게 되는 결정체다. 사랑은 반복되는 관계 맺음(結)의 빛나는 잉여이자, 도래할 맺음의 바탕이다. 쉽게 말해서 사랑은 결혼의 조건이자 결혼이라는 修道 생활의 잉여물이다. 결혼의 의미를 더 확장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멀리 있는 것들과 소통하는 원격 동거, 우주적 공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랑은 무한대의 혼돈에 대한 치명적인 욕망을 진선미라는 여과지로 정제시킨 인문적 정념이라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온몸으로 죽음을 통과하는 사랑만이 통째로 움직이는 인생의 소리, 즉 ‘서걱대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2. 빈궁의 소리

미역국은 人生을 거꾸로 걷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三十대보다는 약간 젊어졌다 六十이 넘으면 좀더 젊어질까 … 우리는 그것을 貧窮의/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 3연 부분)

김상환은 빈궁의 소리를 “욕망의 소리”로 옮긴다. 욕망은 결핍이자 가난이다. 욕망이 클수록 빈궁의 정도가 심하다는 말이다. 횔덜린이 그렇듯, 김수영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다. 정치?경제?사회적 궁핍은 물론이거니와 낙후한 문화적 전통의 궁핍도 시인을 빈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관심의 초점은 비루한 유가 전통에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보다 모더니즘을 갈망했지만, 시인은 전통을 헌신짝 버리듯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빈궁에서 욕망을, 욕망에서 사랑을 찾으려 한다. 시인은 사랑의 변주곡을 이렇게 시작한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시인은 사랑을 욕망과 무차별하게 동일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가난한 욕망 속에 사랑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통 문화의 낙후성은 시인에게 욕망의 원천이자, 사랑의 원천이다. 동시에 그것은 발견해야만 할 사랑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전통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서양의 ‘근대’와 4.19 ‘혁명’에 열광했던 시인에게 어찌 쉬운 일일 수 있으랴!

김상환도 전통 유교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수 백 년 넘게 우리를 옥죄어 왔던 그 끔찍한 가족이데올로기를 순순히 긍정할 수는 없다. “심하게 말해서 공자의 정언명법, 그리고 그것과 맞물려 있는 가족적 온정주의는 공직자 부패를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칭송하게 만드는 원리가 될 수 있다. 연고주의를 부추기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효자가 나라를 망칠 수 있는 것이다. … 혈연이나 지연 같은 자연 발생적 관계를 실체화하여 三綱이니 五倫이니 하는 유교 사상은 개인이 국적, 성별, 언어,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익명적 주체의 자격에서 자유롭게 이합 집산하는 오늘날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다.” 이처럼 낙후하고 빈궁한 전통은 하루빨리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죽은 아이 불알 만지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시인처럼 철학자도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철학자에게서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현대 사회는 “가족적 온정이 너무 모자라서 병들어가는 듯한” 사막화된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공자는 미래적 가치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둘째, 시인에게 그러했듯, 여전히 공자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문화전통은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다. 김상환은 시인에게 공자가 “세포막”5) 역할을 해 주었다고 보고 있다. 동아시아인들이 서구 문명의 치명적인 빛에 그대로 노출될 경우, 그 빛을 광합성의 자원으로 사용하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 공자는 서구라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한 동아시아인들에게 방파제 역할로 사용될 수 있다. 셋째, 미래의 우리가 세계 문화 창달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창성이 필요한데, 전통은 그 원천이 될 수 있다. 독창성이란 것은 난데없는(ex nihilo)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듯한 과거 전체를 미역국처럼 통째로 삶을 수 있을 때 우러나오는 새로움”이다. 요컨대 사막화가 심화되는 궁핍한 시대에 동아시아인들이 자기 정체성의 보호막이자 독창성의 원천으로 삼기 위해 공자의 재전유가 요구된다.

시인은 미역국이 인생을 거꾸로 걷게 한다고 말한다. 미역국을 먹고 가파른 인생의 고갯길에서 미끄러진다. 無로 곤두박질한다. “그래도” 이런 퇴행은 젊음을 선사한다. 아무 것도 없는 젊음은 빈궁하다. 동시에 젊음은 모든 것을 욕망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한국인들이 생일날마다 미역국을 먹는 까닭은 비비 꼬인 인생을 첫 단추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빈궁했던 과거가 마냥 아름답지도 않다. 하지만 통째 움직이는 것이 인생이기에, 결코 과거를 버릴 수 없다. 시인 고정희의 통찰에 따르면, “버림으로써 사라지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오직 버림받은 뒷모습이 있을 뿐이다”6) 그렇다면 남은 길은 미역을 푹 삶아서 기름을 추출하는 것, 즉 과거와 전통을 “완전히 죽여 그 형질을 변형”시켜는 길 뿐이다. 김상환은 미역국에 둥둥 뜬 기름을 “독창성의 함량이자 미래의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과거와 전통을 회고하는 이유다. 창의적인 미래는 빈궁했던 젊음으로 미끄러질 때에만 열린다.

3. 전투의 소리

해는 淸敎徒가 大陸 東部에 상륙한 날보다 밝다/우리의 재(灰), 우리의 서걱거리는 말이여/人生과 말의 간결-우리는 그것을 戰鬪의/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 2연)

김상환은 「미역국」을 “진정한 처녀작”이라고 규정한다. 서구적 모더니즘의 수용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전통을 비로소 긍정했던 이 시야말로 김수영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미역국」보다 한 해 전에 발표된 「거대한 뿌리」(1964)에서도 그런 긍정을 찾아볼 수 있지만, 「미역국」에서야 비로소 시인이 그것을 명료하게 자각했다고 본다. 「미역국」에는 전통의 발견에 대한 대자적 인식이 담겨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상환은 「미역국」2연의 첫 구절을 “어떤 위대한 발견을 암시하는 구절”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의 자장은 좀 더 중층적인 것 같다. 이어지는 '우리의 재(灰)'와 '戰鬪의 소리'라는 시어들 때문이다. 영국 청교도의 아메리카 상륙은 서구인에게는 위대한 발견이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대규모의 재앙이었다. 동아시아인에게도 서양은 우선 재앙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는 무참히 도륙되어 재만 남았지만, 동아시아인은 자신의 문화를 스스로 불태워 버려야만 했다. 무기력하고 고루한 자기 전통과의 살벌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시인은 미역을 끓이고 철학자는 공자를 죽인다. 둘은 모두 전투에서 火攻을 사용한 듯하다. 이 방화는 화염(시인의 모던과 철학자의 포스트 모던)을 통과하고서 살아남는 것을 추출하기 위함이다. 무쇠를 정련하듯, 煉獄에서 죄를 사하듯. 그렇다면 “전통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죽여 미래의 역사를 담을 가죽”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와 견줄 수 있는 명실상부한 공자의 부활이다. 묵은 통념과 虛禮로 고착된 유교를 태워버리자, 종교 교주나 처세술사가 아니라 심오한 철인 공자만 오롯이 남는다. 김상환의 사투에서 부활한 공자는 여느 최첨단 현대 철학자와 겨뤄도 손색이 없다. 대등한 사유의 지평이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선악과 시비를 넘어 동서 철학 비교의 장이 마련될 수 있다. 김상환의 공자론은 크게 몇 가지 논리(“공자의 논리학”)와 개념으로 요약된다. 이중분기, 잉여 수반적 반복, 상호 객체성, 반구, 3중감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잉여 수반적 반복과 3중감응은 앞서 언급했기에, 나머지 것들만 간단히 요약하기로 한다. 우선 이중분기란 하나의 사태가 수평과 수직, 객관과 주관, 일반화와 개체화라는 이중적 방식으로 분화되면서 펼쳐짐을 뜻한다. 예컨대 仁의 잠재력이 현실화되는 과정은 이중분기의 논리에 의거하여 忠恕로 분화된다. 충은 자기 마음의 중심을 지킨다는 뜻으로서 대자적 자기관계, 혹은 내면의 이념에 대한 수직적 관계라면, 서는 타인의 마음과 자기 마음을 같게 함으로서 사회적 대타관계 혹은 타인들에 대한 수평적 관계이다.

상호 객체성이란 사물 속에서 자라나는 관점(수동적 종합)에 자리는 내주는 以物觀物의 태도로서, “사물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대오를 맞추고 장단과 리듬을 맞추면서 이루어지는 상호 감응의 질서”를 뜻한다. 萬物皆相見, 즉 상호 객체성을 존중하는 중국적 시선은 인식 주체의 이성적 질서로 사물을 재단하려는 서양인들의 태도와 다르다. 이런 상호객체성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시선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타자욕망의 대상이 되는 “연극무대 위의 시선”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적 시선의 본질은 ‘눈치’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서로 기다리고 조정한다는 것”, “서로를 보살핀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인들이 타인의 눈치에 각별하게 좌지우지되었던 것은 이런 태도 덕분이다. 이것은 反求의 논리로 이어진다. 반구란 자기로 돌아가 구한다는 것인데, 자기를 찾고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소리에 자신의 주장을 버리거나 수정하는 것을 뜻한다. 활로 과녁을 맞추지 못할 때 자신의 활시위를 조정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 스스로를 조정·변신하는 것을 뜻한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탁월하게 공자(와 김수영)를 해석하는 대목이 수없이 산재해 있다. 이와 같이 김상환은 독창적인 공자론과 김수영론을 펼쳐냈고 멋지게 성공했다. 예고했던 기본 과제는 깔끔하게 완수한 셈이다. 그렇다면 덤은 없을까? 이 과제의 잉여산물로서 “동서를 횡단하는 철학적 탈주선”을 따라 미래의 철학을 스케치하는 일은 어느 정도까지 마무리되었을까?

4. 영원의 소리

풀 속에서는 노란꽃이 지고 바람소리가 그릇 깨지는/소리보다 더 서걱거린다-우리는 그것을 永遠의/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 1연 부분)

시인은 미역국에서 영원의 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상상력이 어이없다가도 경이롭기만 하다. 시인이야말로 자연에 가장 근접한 문화의 첨병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역국은 불을 사용하여 만든 문화적 산물이다. 대표적인 한국의 전통 음식이다. 고래가 새끼를 낳고 인근의 미역을 모두 먹어치운 것을 보고서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산후조리를 위해 미역을 먹었다고 한다. 시인은 남루한 전통을 미역에 빗대려고 했지만, 궁극적으로 문화나 역사라는 것이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현대인들은 문화에서 자연으로 혹은 자연에서 문화로 맞물리는 연상회로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석유는 미역과 같은 조류(algae)에 속해 있는 규조류가 수백 만년 전 침전층에 묻히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미역의 식용기름과 현대문명의 핵심 에너지원인 석유기름은 이렇게 연결된다. 시인의 상상대로 미역의 기름은 미래의 에너지원일 수 있다.

시인은 미역국 기름에서 역사를 읽어내지만, 먼저 자연에 감응한다. 시 속의 자연은 목가적인 풍경이나 과학적 탐구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노란 꽃의 화사한 질서를 함몰시키고 파열음을 내는 혼돈의 자연이다. 이 자연에서 시인은 영원의 소리를 듣는다. 김상환의 김수영론과 공자론은 성장과 도야를 핵심으로 하는 인문주의적 성찰의 산물이다. 물론 그의 인문주의는 이전의 것과는 차별화된다. 전통 인문의 인간(이성)중심주의에 대해 오랫동안 비판적으로 성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숨길 수 없는 인문적 편향 때문인지 이번 책에서도 ‘영원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전작에서 이미 소리 높여 ‘헤겔 輓歌’를 불렀음에도 여전히 이 글 도처에서 헤겔의 유령이 어슬렁거리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열광적인 광자(狂者/도가/분열증)의 ‘초-인문’과 고지식한 견자(狷者/법가/편집증)의 ‘반-인문’은 인문(중용의 공자)의 친구라지만, 위계상 엄연히 인문의 아래에 위치한다. 아니면 인문이 거쳐야할 광기에 불과하다. 반면 공자는 “극복된 광견”이다. 하지만 이런 위계가 정말 존재할까?

철학자는 시인이 명명한 영원의 소리를 “토속적 문화에서 움트는 어떤 보편성의 함량”, “역사적 전통 속에 발아하는 어떤 초역사적 표면”이라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을 “초역사적이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정신적 요소”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너무 빨리, 영원이란 말에서 보편성, 초역사 그리고 정신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까? 영원이란 시어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인문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미역국」의 ‘영원’은 시인의 ‘무한대의 혼돈’이나 박동환의 X( )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정신이라 칭할 수 있더라도, 그렇다면 “정신”이란 무엇일까?(데리다가 하이데거에게 물었던 것처럼)

물론 김상환은 天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원격감응을 역설한다. 중용조차 “광기의 시련 끝에 겨우 성취되는 역량”임을 밝힌다. 심지어 유가 사상의 주류적 방법인 “능근취비(能近取譬)”의 한계를 적시하면서, “먼 곳에 대한 깨달음이 가까운 곳으로 육박하는 능원취비(能遠取譬)”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 모든 사유의 몸짓은 무한대의 혼돈인 자연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그 자연은 기존 문명의 인문학의 이념을 통해 지나치게 순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적으로 박동환 철학과 대비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동환의 3표론과 x의 존재론에 따르면, 문명을 이룬 중국(집체부쟁)과 서양(정체쟁의)은 미래의 철학을 대표할 수 없다. 오히려 문명의 주변부이자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의 철학이야말로 미래에 성큼 다가가 있다. 시적 “영원”이 박동환의 X( )라면, 그것은 어떤 인문적 도야나 성찰의 틀로도 가둘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인문적 질서가 ‘격파’되는 순간에만 드러난다. 공자나 헤겔을 “현대의 극단적 사유”와 관련지어 새롭게 해석해 내고 있지만, 도리어 그것이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가로막고, X( )의 위력을 순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만 같다. 김상환은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라는 시인의 말로 글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의 인문주의적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표현이다. 하지만 대항-문명의 참된 의미는 새로운 문명이 되어 중심을 교체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문명과 ‘영원히’ 서걱대는 소리에 화답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화답 역시 항상 “서걱거리는 말”일 수밖에 없다.

*****

마음을 먹는다는 말/기막힌 말이에요./마음을 어쩐다구요?/마음을 먹어요! … 마음먹으니/만물의 귀로 듣고/만물의 눈으로 봐요.//마음먹으니/태곳적 마음/돌아보고/캄캄한데/동터요.7)

다분히 주관적인 듯 보이는 마음먹기가 오히려 만물의 귀와 눈으로 감각하게 하고 태고의 신비까지 알려준다. 진정한 환희는 ‘마음먹는’ 자에게만 선사된다. 여기 김상환이 갓 끓인 맛있는 미역국이 있다. 우선 감사의 마음으로 즐겁게 먹자. 그 다음엔 미역국을 손수 끓이려는 마음까지 먹기로 하자.

*후주

1) 반면 사르트르, 체 게바라 같은 서양의 실천적 지식인의 목소리에는 플라톤의 이상주의/합리주의와 근대 낭만주의의 숨결이 남아있다.

2) 예컨대 「성인(聖人)을 찾아서 -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언저리」가 있다. 이성복,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문학동네, 2001. 211쪽 이하.

3) 김수영, 『김수영전집2 산문』, 민음사, 1984. 249쪽.

4) 김수영, 같은 책, 271쪽.

5) 박테리아의 세포막은 세포 보호의 역할 뿐만 아니라 내외 물질의 선택적 투과, 정체성 표시, 에너지(ATP) 생성 및 광합성까지 담당한다. 이런 역할까지 고려한다면, 동아시아인들에게 공자는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6) 고정희, 『고정희 시전집2』, 도서출판 또하나의문화, 2011. 192쪽. 「버림받은 지구, 그 이후-암하레츠 시편 19」 중에서.

7) 정현종,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부분. 60-61쪽.

 

김동규 연세대·철학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멜랑콜리 담론사 연구,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멜랑콜리아-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등이 있다. 연세대 철학강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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