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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성 문제 풀려면 ‘차이’ 인정하는 ‘여성주의 실천적 대화’가 필요하다
오늘날 성 문제 풀려면 ‘차이’ 인정하는 ‘여성주의 실천적 대화’가 필요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8.02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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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21강. 허라금 이화여대 교수의 ‘성과 결혼, 그리고 가족’

 

지난달 23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의 주제는 ‘성과 결혼, 그리고 가족’이었다. 허라금 이화여대 교수(여성학과)가 진행한 이날 강연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성 규범’의 한국적 격돌을 겨냥, 이를 ‘여성주의 실천적 대화’로 접근하는 데 무게를 뒀다. 그는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을 인용해 성, 가족,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 현상을 ‘도덕적 신념의 전쟁’으로 표현하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여성주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여성주의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차이를 인정하는 인정의 윤리학이 ‘성과 결혼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오늘날 다양한 유형의 가족 결합이 늘어나고 있고 이에 따른 성의 다차원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데 주목해 “이런 변화가 가져온 혼란스러운 신념들이 부딪치는 갈등을 풀기 위해 도덕적 패러다임의 차이, 여성주의 실천적 대화, 인식의 체현성, 타자의 삶에 대한 맥락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여기서 그는 본질적인 접근보다는 주변적인 것에 접하는 ‘정동’의 태도를 보였다. 즉, “성 또는 가족이 무엇인지 본질적 가치를 따지거나 이상적인 조건이 무엇인가를 논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비합법적 가족’이 겪는 어려움이나 ‘정상’이라고 분류되는 것 속에서 일어나는 부당함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 아닐까”라고 되물었다.
허 교수는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 한국여성철학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원칙의 윤리에서 여성주의 윤리로』가 있으며 『윤리학과 그 응용』, 『국가와 젠더』, 『사회변동과 여성 주체의 도전』, 등을 공저했다. 이밖에 콰인의 『논리적 관점에서』를 비롯, 『인식과 에로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등을 번역했다.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최근 성을 둘러싼 갈등, 폭력 등의 사건 사고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이 문제들이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이 같은 갈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에서 해결을 모색해야 할까. 성 규범이 격돌하는 한국의 상황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성, 가족, 결혼을 둘러싸고 한국 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은 ‘도덕적 신념의 전쟁’이라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충돌의 현장에 여성주의 윤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자주 ‘차이의 인정’이란 말을 듣는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정의 정치학과 함께 인정의 윤리학이 필요하다. 오늘 강연에서, 나는 인정의 윤리학이 ‘성과 결혼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푸는 데 요청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일인칭 서사와 체현적 인식론
여성들이 사적인 관계를 보살피는 활동 속에서 발전시킨 보살핌의 윤리가 사적인 공간에만 적합한 것은 아니다. 보살핌의 윤리, 책임의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문제 해결을 주도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앨리슨 재거(Alison Jaggar)의 글 「여성주의 도덕적 추론의 입장을 향하여」를 주목해 보자.
재거는 지난 1970~80년대를 통해 활동했던 주요 여성주의 풀뿌리 활동가들이 어떻게 집단 토론의 방법을 가지고 사회적 실천 운동을 했었는지를 연구했다. 그녀는 당시 액티비스트들이 회람했던 타이핑 서류들이나, 소형 출판사에서 발간한 소책자들을 속에서 일련의 유사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들이 자신의 도덕적 경험을 세밀할 정도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나서, 청자들과 그 경험을 성찰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는, 집단 토론의 방식을 택했었다는 것이다. 재거는 이런 대화적 사유의 방식을 ‘여성주의 실천적 대화(Feminist Practical Dialogue: 이하 실천적 대화)’라고 명명했다. 실천적 대화가 일인칭적 서사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도덕성을 갖추는 데 필수적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실천적 인식이란 추상적 진리에 이르는 추론적 과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들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체현적 인식론(epistemologies of embodiment)’이라는 부제가 붙은 스컬리(Jackie Leach Scully)의 「도덕적 몸(moral bodies)」으로 돌아가 보자. ‘의도적인 유전적 청각장애 아이 낳기’와 관련해 당시 논쟁의 한쪽에, 제3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청각장애인 공동체와 장애자 활동가 그룹이다. 그들은 청각 장애가 주류 논쟁에서 말하듯 해악(harm)이 아니라는 점을 주류 사회에 전하고자 했다. 그들에게는 그녀들의 결정이 ‘직관적으로 올바르고’ ‘합리적으로도 정당화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각장애인 그룹에서 말하는 바,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은 주류 논쟁에서 부모의 권리를 옹호했던 이들에게조차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같은 이해의 통약불가능성은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체현적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길리건의 연구에서 보살핌의 언어를 구사했던 여성들이 도덕적 개념이 없는 것으로 평가됐듯이, 연결 관계 속에서 개인적 자아를 구성하는 이들의 언어는 말이 되지 못한다. 이런 불통으로 인한 고통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 이것은 최근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담론의 전개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한 개인이 그곳에서 마주친 한 개인을 살해한 사건으로 사건의 의미는 확정된다. 그리하여 여성에 대한 증오 범죄라는 여성들의 호소는 공적 공간에서 인정되는 말이 되지 못하고 의미 없는 소리가 되고 만다.

이제 대화의 목표는 달라져야 한다
실천적 대화의 상황에서 체현적 인식의 차이를 전제한다면, 이제 대화의 목표는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사회 실천적 대화의 목적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의 경험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목표 변경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인정할 진리를 계몽하기 위한 것이거나,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회에 속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적 의미의 차이를 맥락적으로 이해할 것을 목표하는 것으로 말이다.

실천적 대화에서 일인칭적 개인적 서사가 대화의 주된 말하기 방식이었음을 다시 환기해 보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명제 중심의 논변 식 토론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경청하고, 그 과정에서 나와 다른 타자의 경험에 대한 공감을 확대해 가는 대화다. 개인 서사가 청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고 열린 태도를 갖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협동적 대화를 위한 전제이며, 협의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정 윤리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지향성을 갖고 자신의 삶을 실천할 자유를 존중하자는 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형식적 존중과 관용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상대주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를 존중한다는 것이 어떤 것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천적 대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우리에게 남는 과제는 성적 실천의 구체적 서사들을 함께 듣고, 함께 그 경험들을 성찰하는 ‘실천적 대화’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가족에 대한 특정한 하나의 정의(definition)가 사회 규범적 역할을 할 때, 현실 속에서 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는 그 동안 많지 않았다. 차이의 정치학을 말하는 아이리스 영(Iris Young)은 이런 ‘가족’ 관념은 이른바 ‘결손 가정’, ‘비정상 가족’ 과의 대조를 통해 유지돼 왔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족이 무엇인지, 성이 무엇인지를 그 본질적 가치를 따지거나 정의하기보다는, 이상적인 가족의 조건이나 이상적인 성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논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정상’ 혹은 ‘합법’이라고 정의되지 않음으로써 배제되는 이른바 ‘비합법적 가족’이 겪는 어려움이나, ‘정상’이라고 분류되는 것 속에서 일어나는 부당함과 고통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그들이 호소하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 아닐까.
인정의 윤리 공간을 넓혀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나와 다른 삶의 이야기들을 경청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과 인식의 틀을 상대화할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런 대화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격한 성, 결혼, 가족의 변화 속에서 요청된다. 대화를 하려는 노력이 갈등과 격돌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 책임이고 시민적 덕의 실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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