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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사유하는 방식
공간을 사유하는 방식
  •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6.08.0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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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방 안의 코끼리’는 감추고 싶지만 감춰지지 않는 문제를 가리키는 관용구다. 그런데 코끼리 같이 큰 문제에 접근할 때 문제 자체에 압도되지 않고자 그것이 놓인 ‘방’을 역으로 드러내는 방법도 있다. 미술사학자 전영백의 『코끼리의 방: 현대미술 거장들의 공간』 (두성북스, 2016)은 공간에 대해 사유하는 10명의 현대미술가를 다룬다. 공간은 우리시대의 화두임이 분명하다. 우리 삶이 부침을 거듭할수록 안정적인 정박지에 대한 동경은 커져가지만 어느덧 우리는 고속도로, 정류장, 쇼핑몰, 공원, 호텔과 같이 그저 지나치는 장소들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의 기억과 정체성은 기반을 잃고 공동체적 결속력은 사라진지 오래다. 공간은 이처럼 번잡한 세상사로부터 보호막이 돼주기는커녕 오히려 위기의 진원지이기에 진지한 탐색을 요구하고 있다. 공간을 사유하는데 과연 미술은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공간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현대미술의 핵심 사안이라고 저자 전영백은 말한다. 1960년대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서양 주류미술은 작품이 놓인 장소와 유리된 미적 자율성만을 강조했었다. 이에 반해 이른바 ‘장소 특정성’이야말로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의 주요 특징으로, 작가보다는 관람자를, 시각 중심보다는 공감각적 체험을, 오브제 자체보다는 흔적과 기억을 중시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미술가들은 공간에 얽힌 주체의 지각과 기억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조각이 건축에 개입해 공학과 디자인이 결합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Arc)」(1981)는 관람자에게 작품을 둘러싼 공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뉴욕 맨해튼의 한 광장을 떡하니 가로막은 이 강철판 설치물은 시민의 보행을 가로막은 죄로 곧 강제 철거되지만 여기서 공간과 조각품 그리고 관객의 체험은 잠시나마 일체를 이룬다. 미술의 ‘장소 특정성’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관람자를 더욱 완전히 장악하는 제임스 터렐의 「태양 원반의 통치」(2013)는 빛을 재현하기보다 아예 눈앞의 물질로 구체화함으로써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영적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들도 공감각적 체험의 절정을 제공한다.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터바인 홀에 설치된 「날씨 프로젝트」(2003)는 가습기를 이용해 미세한 안개를 퍼뜨리고 노란빛을 방사하는 수백 개의 램프로 만든 둥근 원을 설치해 인공태양을 만들어냈다. 도시 안에 만들어진 이 거대한 유사자연물이 준 감흥은 6개월간 200만 명이 관람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건축에 개입한 조각은 현재적 체험만이 아니라 기억의 표상도 제공한다. 마타 클락의 작품들은 작업의 물적 지속성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덧없이 소멸하는 이른바 ‘노뉴먼트(Nonument)’를 의도한다. 파리 한복판에 놓인 철거 직전의 대형건물들을 자르고 구멍을 뚫은 「원뿔형 가로지르기」(1975)는 도시의 생활공간에 직접 개입해 장소와 작품을 일치시킨다.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있는 연립주택 건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원형 구멍 앞에 선 관람자는 구멍 사이로 새로운 파리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이면에 밀착된 과거의 폐허를 목격하게 된다. 이보다 좀 더 암울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도리스 살세도의 추상적 작품들이다. 「십볼렛」(2007)은 마치 지진이 난 듯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바닥에 균열을 냈다. 형식주의 모더니즘에서 추구하는 추상과는 달리 살세도의 추상적 공간은 제3세계에서 자행됐던 극심한 폭력과 억압을 인류보편적인 기억으로 전달한다.

현대미술의 공간 탐색은 인간 삶의 중심을 이루는 집의 기억을 빼놓지 않는다. 레이첼 화이트리드는 관습적 지각을 뒤집어 욕조나 마루, 방 같은 집 안의 빈 공간을 주물로 뜨는 작업을 시도했다. 런던의 낙후된 지역인 그로브가에 설치됐다 철거된 「집」(1993)은 빈 공간을 재생한 그야말로 뒤집혀진 공간으로, 그 표면에는 인체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것은 집과의 물리적 연계를 박탈당한, 부재하는 신체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공간적 사유의 귀결점은 우리의 몸이다. 안토니 곰리의 인체조각은 몸의 해부학에서 건축 공간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다층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북쪽의 천사」(1998)는 그가 자신의 몸을 랩으로 싸고 석고를 둘러 스스로를 거의 생매장시켜 만든 작품이다. 실제 몸의 흔적을 조각으로 떠낸 것이다. 곰리는 몸과 공간의 물리적 관계를 몸과 몸의 인간적 관계로 파악한다. 영국 게이츠헤드시의 한 미술센터를 위한 설치작품 「영역필드」(2003)는 지역주민 200명이 자원해 만든 200개의 서로 다른 인체 주물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공간적 관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은 우리가 거주하는 집과 도시, 자연, 그리고 몸의 공간에 대한 공감각적 지각과 기억을 주제로 삼았다. 지각과 기억이 만나는 미술적 공간을 탐구하면서 저자 전영백은 기억이 지각의 사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진은 ‘스틸 컷이라기보다는 동영상’에 가깝다. 결국 현대미술은 속절없는 일상의 한가운데서 우리 삶의 역사적 흐름을 잊지 않도록 일깨워준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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