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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입된 ‘哲學’ … 1920년대 들어 전통철학 영향력 줄고 ‘서양철학’ 연구 늘어
일본에서 수입된 ‘哲學’ … 1920년대 들어 전통철학 영향력 줄고 ‘서양철학’ 연구 늘어
  • 교수신문
  • 승인 2016.07.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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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우리철학연구소 2016년 학술대회_ 우리철학의 현황과 과제 ②

 ‘철학’이라는 어휘가 한국에 대량으로 소개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들이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펴낸 신문과 학술잡지를 통해서다. 특히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일본에서 번역된 서양 학문을 소개하는 과정에 ‘철학’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조선대 우리철학연구소(소장 이철승)가 지난 1일, ‘우리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전환기 전통철학의 계승과 변용’을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는 ‘우리철학’의 가능성을 묻는 본격적인 작업의 첫단추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이철승 소장의 기조발제문 「우리철학의 현황과 과제」에서 ‘철학’ 용어의 탄생과 철학 개념의 굴절을 다룬 부분을 발췌해, 지난호의 서론 부분에 이어 계속 소개한다. 다음호에는 ‘외래철학의 확산과 전통철학의 관망’ 부분을 발췌할 예정이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철학’이라는 용어는 한국인이 만든 어휘가 아니라, 서양에서 사용하는 ‘Philosophia, Philosophy’에 대한 일본 사람인 니시 아네마(西周)의 번역어다. 그는 哲學, 科學, 美學, 技術, 主觀, 客觀, 演繹, 歸納 등 수많은 근대 학술 용어를 만들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學術’이란 어휘 역시 ‘Science and Arts’를 그가 ‘學術技藝’라고 번역한 것의 준 말이다. 이처럼 그는 이른바 ‘서양철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의 번역 과정을 통해 20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철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요 용어를 만들었다.

그런데 니시 아네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주요 사상가였다. 이들에 의해 강하게 주장된 일본의 근대화는 아시아 문명을 벗어나 서구 문명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동아시아의 전통문명은 지양의 대상이지, 지향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儒·佛·道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폐기하고, 민주주의와 과학기술로 무장한 서구의 사상으로 무장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니시 아네마에 의해 번역된 ‘철학’이란 용어 속에는 이러한 그의 관점이 깊게 반영돼 있다.

그는 초기에 므다 마미치(津田眞道: 1829~1902)의 『性理論』(1861)에서 “서양의 학문이 전해진지 이미 100여 년이다. 격물, 화학, 지리, 기계 등 여러 학문에 이르러서는 간혹 그것을 규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유독 우리 ‘希哲學’의 한 학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지적해, ‘Philosophy’를 ‘밝은 배움을 간절히 바란다’라는 의미의 ‘希哲學’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는 1863~1865년 동안의 네덜란드 유학을 마친 후부터 연구해 1874년에 발표한 『百一新論』에서 儒學의 폐기를 본격적으로 주장하며, ‘Philosophy’를 ‘格致’, ‘窮理’, ‘道德’, ‘性理’, ‘理學’ 등의 전통적인 유학적 개념과 구별되는 ‘철학’으로 번역해 학계에 발표했다. 이 ‘철학’이라는 용어가 나오자, 학계에서는 이 용어와 다른 용어의 경쟁 과정을 거친 후에 마침내 ‘철학’이 승리를 거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러한 경쟁을 거친 후에 일본 학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철학’을 ‘Philosophy’의 대응어로 사용했다. 이러한 일본 학계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학계에 전해지고 수용됐다.
그런데 이 ‘Philosophy’가 ‘철학’으로 번역된 원인을 밝힌 자료는 1873년의 한 문건이다. 니시 아네마는 「生性發蘊」(1873)에서 ‘Philosophy’가 왜 ‘철학’으로 번역돼야 하는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논한다. 그에 따르면 ‘哲學’의 원어는 영어로 Philosophy, 프랑스어로 Philosophie이다. 희랍어의 Philo는 사랑의 의미이고, sophos는 賢의 의미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가진 학문을 Philosophy라고 한다. 주돈이의 이른바 ‘士希賢’의 뜻이다. 이것은 후세에 습관적으로 쓰게 된 이치[理]를 끊임없이 강구하는 학문이다. 理學이나 理論이라고 직역할 수 있지만, 다른 것과 혼동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哲學이라고 번역해 동아시아의 儒學과 구별하고자 한다. 
이처럼 니시 아네마는 주돈이의 ‘希賢’이라는 개념을 차용해,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했다. 이는 그가 ‘Philosophy’를 당시에 ‘science’의 번역어인 理學과 혼동되는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儒學과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니시 아네마는 ‘철학’을 物理와 心理를 통합하는 학문으로 여기고, 유학을 심리만을 다루는 학문으로 여기기 때문에 ‘서양철학’을 동아시아의 유학보다 우수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니시 아네마는 ‘지혜를 사랑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하는 과정에 앎과 행함의 통일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유학을 비롯한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사유방식을 배제하고, 서구 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과학적인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니시 아네마에 의해 창안된 ‘철학’ 개념의 이러한 서구문화 중심주의적인 관점은 이후의 일본 철학계와 한국 철학계에 폭넓게 반영돼 전통철학의 침잠과 ‘서양철학’의 전성기를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됐다. 곧 ‘철학’ 개념의 이러한 굴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철학계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국의 철학계에서 ‘서양철학’ 연구의 활성화와 전통철학 연구의 감소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철학’의 용어가 다른 번역어를 누르고 빠르게 확산된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1877년에 설립된 동경제대의 초대 총장인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의 적극적인 역할 때문에 ‘哲學’이 성리학, 격치학, 궁리학, 리학 등의 어휘를 누르고 동경제대 문학부에서 제1과의 명칭으로 사용됐다. 둘째, 이노우 데쓰지로(井上哲次郞: 1855~1944), 유지로 모토라(元良勇次郞: 1858~1912), 나카지마 리키조우(中島力造: 1858~1918) 등이 펴낸 『哲學字彙』(1912)가 출간된 후에 ‘철학’이라는 용어가 거의 모든 사전에서 ‘Philosophy’의 번역어로 사용됐다.

비록 명치유신 이후, 리학과 리론 등을 ‘Philosophy’의 번역어로 사용하고자 한 학자들(井上円了, 中村正直, 西村茂樹, 中江兆民 등)이 있었지만, 명치 중기 이후에 漢學 폐기의 경향은 대세가 됐다. 가토 히로유키의 『人權新論』(1882)을 시작으로 사회진화론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유학을 근대화나 문명화의 저해 요인으로 보는 니시와 후쿠자와와 같은 시각이 대세가됐고, 니시가 조어한 ‘哲學’이란 용어는 ‘理學’을 비롯한 많은 번역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한편 한국에 소개된 ‘서양철학’의 내용은 니시의 번역어보다 훨씬 이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양철학’의 초기 내용은 천주교의 영향이다. 이수광(1563~1628)이 소개한 『天主實義』와 1631년에 정두원(1581~?)이 북경에서 가져온 세계 지리서인 『職方外記』가 초기의 문서다. 또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황사영(1775~1801)은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던 백서에 이가환(1742~1801)의 집에 소장된 『직방외기』와 『西學凡』을 언급하는데, 『서학범』은 선교사인 알레니(Julius Aleni)가 서양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학문을 文科·理科·醫科·法科·敎科·道科로 나누고, ‘철학’을 이치를 연구하는 ‘斐祿所費亞’( Philosophia)의 학문으로 여기며 이치를 연구하는 이과의 범주에 해당시켰다. 이 책에서는 또한 斐祿所費亞(Philosophia)의 범주에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수학, 윤리학 등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이러한 ‘서양철학’의 내용은 대부분 종교인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범주를 분류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서양철학’을 오롯이 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면에 제한적이다.

한국에서 ‘철학’이란 용어가 일반인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유길준은 ‘철학’을 지혜를 사랑해 이치에 통하기 위한 학문으로 여긴다. 그에 의하면 도덕학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속하고, 궁리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속하며, 헤밀턴과 스펜서는 성리학자이다. 유길준이 비록 ‘서양철학’과 성리학의 같고 다른 점에 대해 엄밀하지 못한 점이 있을지라도, ‘철학’ 용어와 그 내용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낮지 않았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어휘가 한국에 대량으로 소개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들이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펴낸 신문과 학술잡지를 통해서다. 특히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일본에서 번역된 서양 학문을 소개하는 과정에 ‘철학’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는데, 이는 ‘철학’이 근대 학문 체계에서 학문적으로 자립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양의 숭실학당은 1906년에 大學部를 설치해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개론, 심리학, 논리학 등의 강의를 개설했다. 그리고 李定稷(1841~1910)은 칸트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칸트와 주희를 비교한 「칸트 씨의 철학이론 대략(康氏哲學說大略)」(1903~1910)을 발표했다.
또한 장지연은 <황성신문>에서 “철학은 궁리의 학이니 각종 과학 공부가 미치지 못하는 곳을 연구하여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맑게 하는 고등 학문이다”고 하여, 철학에 대해 과학을 포괄하면서 과학이 다루지 못한 영역을 규명하는 독립된 영역으로 이해했다.

한국의 사상계는 식민지의 기운이 강화되는 이 무렵에 서양 근대 학문으로 상징되는 新學과 전통 유학으로 상징되는 舊學 사이에 다양한 관점이 도출됐다. 특히 이 가운데 유학자인 郭鍾錫 (1846~1919)과 그의 제자인 李寅梓(1870~1929)가 이해한 ‘서양철학’은 물질에만 집착하는 학문이다. 이 때문에 이인재는 1912년에 성리학의 관점에서 서양철학을 평가한 『古代希臘哲學攷辨』을 지었다. 그는 이 책에서 유학의 토대 위에 서양철학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이란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으로 구성돼 있고, Philosophia는 그리스어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번역하면 哲學이다. 이 철학은 우주의 이치를 연구하고, 사물의 원리와 존재를 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삼라만상 가운데 하나의 이치만을 연구해 그 실용성을 찾기 때문에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다.

또한  全秉勳(1860~?)의 『精神哲學通編』은 중국 북경에서 간행됐는데, 심리학, 도덕철학, 정치철학 등이 논의되고 있다. 전병훈은 이 책에서 그리스의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상을 소개하고, 근대의 데카르트, 베이컨, 몽테스키외, 칸트 등을 취급하고 있다. 그는 고대의 철학자 가운데 플라톤을 높이 평가하고, 근대의 철학자 가운데 칸트를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처럼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철학과 관련된 글들이 있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통철학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서양철학’의 연구 풍토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철승 조선대·철학과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자의 서재』, 『동양사상의 이해』, 『동양처학의 자연과 인간』 등 다수의 책을 펴냈으며, 『현대신유학』 등을 번역했다. ‘우리철학’의 기원과 형성, 사상적 특성 등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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