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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 석지우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6.07.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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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석지우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박사후연구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대학원 내내 지도 교수님이 늘상 하시던 말씀이다. 지도교수님 밑에서 10여년이 넘게 있었건만 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이야기에 머리는 끄덕였을지언정, 마음으로 끄덕인 적은 몇 번이었을까. 석사 반 년차 만에 당돌하게도, 대학원이란 곳에서 내가 무얼 얻어갈 수 있는지, 정말 내가 원하는 ‘무언가’(나도 모르는 막연한, 말 그대로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곳인지를 교수님께 따져 물었고, 내가 무언가를 보여줄 테니 나에게 프로젝트를 달라고 요청 아닌 ‘요구’를 했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평소 정말 불 같은 성미에 무서운 분으로 정평이 난 분이셨는데도, 그때만큼은 왠일이신지 나를 꾸중하지 않고 나에게 프로젝트를 하나 맡겨 주시곤 3개월 후 연구 진행방향을 보자고 하셨다.

내 연구가 생겼다는 기쁨과 교수님이 날 인정해 주셨다는 착각으로 3개월여 잠을 줄여가며 ‘무언가’에 매진했던 것 같다. 3개월 후 그리 허송세월 보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출발점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고, 연구라는 것이 그렇게 녹록치 않구나라고 처음 깨닫게 됐다. 아무런 시작도 하지 못해 코가 쑥 빠져 있는 내게 교수님은 연구는 마음만으론 안된다며 해주신 말씀이 “머리는 냉정하게, 가슴은 뜨겁게 연구하라”였다. 지금 와서야 그 말이 교수님의 늘상 하시는 ‘레퍼토리’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때 당시는 꽤나 위로가 되고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부터는 섣부른 도전은 열정이 아니라 무모함이란 걸 알고, 진득하게 기본기부터 차근히 쌓아왔던 것 같다. 몇 개의 프로젝트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한 후에야 나에게도 박사학위가 주어지고, 이젠 제법 연구란 무엇인지 아는 정도가 됐다. 하지만 사람이란 참 간사한 존재여서 이제 좀 연구를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할 지 알겠다 싶더니 바로 타성에 젖어 버렸다. 어떤 연구를 해야 실적으로 연결이 되는지, 최신 연구 동향만을 좇아가며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만을 찾아 다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몇 달 전인가 연구하기 까다로운 주제에 골머리를 싸매며 있는 후배에게 쉬운 길을 놔두고,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한다며 핀잔을 주자 세상에 쓸모 없는 연구가 어디 있냐는 반박에 참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스스로는 ‘관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실상의 나는 타성에 젖어 있었던 나를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빨리 자리 잡기 위해서, 아니면 보다 나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 스스로 단련하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연구를 내 갈 길로 정한 순간에서 십 여년이 넘어간 지금에 와서야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연구란 게 무엇인지, 또 나는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연구자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자문해본다는 것이 참 새삼스러우면서도 낯간지러운 일이었지만, 나처럼 경험의 덫에 빠진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참 재미있게도 무모한 열정만을 가지고 도전하던 처음과 마찬가지로 내게 필요한 정답은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였다.

현명한 사람들은 타성에 빠진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장치를 하나씩 마련해 둔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총 25여 편의 영화를 만든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은 매번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전 과거에 살던 동네 서점에 들러 같은 책을 읽으며 첫 영화를 만든 그 순간을, 그 마음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아마도 교수님이 늘상 외치시던 저 문구가 열정을 잃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교수님만의 장치였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고 참으로 현명하신 연구자셨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아무래도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가기 위한 장치를 하나쯤 마련해 두어야겠다. 그러다보면 나도 언젠가는 후속세대들에게 통찰을 줄만한 저런 멋진 문구하나쯤 던져줄 수 있을만한 참된 연구자가 되지 않을까?

 

석지우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박사후연구원
행위 중독에 관한 주제로 충남대에서 박사를 했다. 중독 관련 뇌 메커니즘에 관한 논문을 다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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