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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상상력의 계보
식물적 상상력의 계보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6.07.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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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단풍나무 밑동은 어찌나 고운지 나는 연거푸 입맞췄습니다/찝찔한 껍질의 감각이 혀에 묻어났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급한 골짜기로 쏟아지는 물을 한쪽 어깨로 받으며,/연한 뿌리로 바위 틈에 길을 만들며…
―이성복, 「나무 1」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3년째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죽음학’이라는 다소 낯선 학문영역부터 ‘죽음교육프로그램 개발’이라는 거창한 연구 목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 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죽음을 보다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생긴 것 같다. 물론 죽음이 자신과 관련된 문제라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다보니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각광받는 樹木葬이 스위스에서 비교적 최근에 시작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수목장은 사람이 죽은 뒤 화장을 하여 뼛가루를 나무 주변에 뿌리거나 묻는 장례 방식이다. 수목장에는 죽은 사람의 유해가 살아 있는 나무와 결합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나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까지 담겨져 있다.

수목장에도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몰라도 문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식물적 상상력’도 유한한 생명을 지닌 사람이 나무와 한 몸이 돼 영속적인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유사한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 나무의 생명력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식물적 상상력은 동서양 문학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1년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가 퇴임사에서 “시인 김지하 씨가 6년여에 걸친 옥살이에서도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식물적 상상력”이었다고 말하면서 식물적 상상력을 문학의 미래로 본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문학작품을 통해 놀라운 식물적 상상력을 보여준 작가로는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와 우리 문단의 소설가 이승우와 한강이 있다. 세 사람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나무를 꿈꾸고 나무를 닮고 싶어 하며 나무의 생명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무인도에 사는 로빈슨 크루소는 대지와 성적 결합을 통해 ‘만드라고라’라는 식물을 태어나게 한다. 로빈슨의 向地性의 삶은 섬에서 자라는 서양 삼나무와 그가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투르니에의 『레 메테오르』에서는 ‘드보라’라는 여인이 정원을 가꾸던 중 죽지만 땅에 묻힌 뒤 “다리는 뿌리가 되고 머리카락은 잎이 되며 몸은 줄기가 되어” 정원 자체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투르니에 소설에서 사람의 몸이 나무로 변한다는 것은 그가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죽음을 넘어 불멸성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 문학에서 식물적 상상력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작가는 이승우다. 그는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나무를 꿈꾸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줬고, 사람이 나무와 동일시될 뿐 아니라 나무가 사람처럼 사랑의 결실을 맺고 바다를 건너 고향에 다녀온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나무를 꿈꾸는 사람은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고,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미 나무인 것”을 믿는다. 불구가 됐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은 “키가 거의 이백 미터쯤 되어 보이는” 야자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바닷가 마을 남천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 받을 것이다. “현실 밖의 세계는 정결했고, 현실 안의 세계는 추했다”고 믿는 주인공 앞에서 사람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바다를 건너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식물적 상상력은 육체적·정신적 폭력에 맞서 저항하고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나타난다. 피와 육식에 대한 嗜好로 상징되는 야만성, 가부장적 폭력으로 대표되는 인간본성의 잔혹성과 마주한 영혜가 “몸에는 잎사귀가 자라고, 손에서는 뿌리가 돋는다”는 나무와의 동일시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것은 간절함을 넘어 처절함까지 느껴진다.

‘죽음학’ 연구가 앞으로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잠정적인 결론을 미리 내린다면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논의는 현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나무를 꿈꾸고 나무의 생명력을 갈망하며 나무와 하나가 돼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물적 상상력도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고 죽음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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