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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당부 안고 살아온 50년 고고학 인생
“학생·동료 교수들 있어서 가능했다”
스승 당부 안고 살아온 50년 고고학 인생
“학생·동료 교수들 있어서 가능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6.28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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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개와 그 이웃들’ 국제학술회의 조직자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 1941년 서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박물관 수석연구원을 거쳐 충북대 교수로 30년 4개월 지냈다. 충북대 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고대학회, 한국구석기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아시아구석기학회 명예회장으로 있다. 특히 한국 구석기연구의 개척과 연구조사에 공헌하고, 세계고고고학 발달에 기여한 공로로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명예고고학박사, 영예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단양 수양개 유적과 고양 가와지볍씨 발굴 등에 깊이 관여했다. 구석기 용어의 우리말 사전화작업의 기초를 만드는 데도 중추역할을 했으며, 국제학술회의 ‘수양개와 그 이웃들’을 조직해 한국 구석기학을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51개 유적을 조사, 400여 편의 논문과, 각기 40여 권의 발굴보고서와 편저서로 국내외 학계에 보고했다. 2016년 3월 제22회 용재학술상을 수상했다. 사진= 최익현

 학자는 초심이 중요합니다. 큰 학자가 되라는 홍이섭 선생님의 말씀, ‘세계적 학자가 되라’는
용재 백낙준 총장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한 방향 인생길을 달려온 것이죠. 왜 유혹이 없었겠어요?
그렇지만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약속대로 초심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세 가지 직함이 표기돼 있었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충북대 명예교수, 그리고 아시아구석기학회 명예회장. 셋 모두 그가 평생 걸어 온 길과 이어져 있는 곳이다.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75세)이다.

충북대 박물관과 그가 현재 이사장으로 몸담고 있는 한국선사문화연구원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오전 11시 반부터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5시, 창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에야 마무리됐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열정이 뿜어져 나올까. 청주고속터미널을 빠져나와 충북대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박물관 입구에 전시돼 있는 ‘용곡인’ 동상 앞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이 ‘용곡 7호 사람’의 손에는 단양 수양개에서 발굴한 ‘주먹도끼’가 들려 있었고, 頭像은 북한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 인골에서 가져온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융조 이사장은 고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시도한 융합적 남북통일 염원이라고 귀띔했다.

1941년 충북 서산에서 태어난 이융조 이사장에게는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생 선택지가 몇 개 있었다. 하나는 농부였던 아버지의 꿈을 이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천주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자기 의지의 길이 있었다. 학부에서부터 연세대 대학원 3학기까지 홍이섭 교수 지도로 한국천주교회사를 공부하던 그에게 어느 날 운명의 선택이 찾아왔다. “1965년 석장리 2차 발굴에 참여한 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줬던 거 같아요. 1차에 참여했던 대학원생들이 저마다 다른 사정으로 모두 불참했는데, 저만 2차 발굴 현장에 내려갔어요. 학과 일로 ‘급 상경’ 전문을 받고 서울로 떠나는 저에게 손보기 교수님이 ‘박물관에서 구석기를 공부하자’는 권유를 하셨던 겁니다.”

홍이섭 교수와 손보기 교수 사이에서
학과에 전화기 하나만 달랑 있던 시절이었다. 사학과 조교였던 그가 멀리 공주 석장리 발굴 현장에 내려와 있었지만, 학과 교수들은 다급했던 모양이다. 1964년 11월에 시작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조사에 사학과 조교로 참가하며 유적 조사와 깊은 인연을 쌓아가던 그는, ‘급 상경’ 요청에 의해 발굴 현장을 떠나게 됐지만, 농사꾼의 아들 ‘이융조’는 손보기 교수의 눈에 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게 그의 운명을 뒤바꾸고 말았다. “갈등 많이 했어요. 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자 홍이섭 교수님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터라, 갑작스런 손보기 교수님 제의에 사실 어찌해야 할지 몰랐어요. 결심을 하고 홍 교수님을 찾아뵈니 ‘어느 분야라도 같은 한국사니 괜찮다. 그러나 반드시 그 방면에 큰 학자가 돼야만 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큰 학자가 돼야만 한다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죠. 그렇게 구석기와 인연이 시작된 겁니다.”

이후 이융조 이사장은 조교 임기를 마치고 1965년 9월 박물관에 임시직으로 첫 출근을 시작해 1976년 10월 퇴임할 때까지 만 11년을 연세대 박물관에서 생활했다. 말이 박물관이지 지금의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척박한 박물관이었다. 연세대 박물관은 1965년 3월 15일 개관했다. 그리고 10년 이 흘러서야 온전한 단독건물을 확보해 처음으로 구석기 전문 박물관의 격을 갖출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융조 이사장은 평생의 스승 손보기 교수에게서 삶과 연구의 자세를 배웠다. 이러한 자세는 연세대 박물관에서 충북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 더욱 확고해졌다. 1976년 11월 그는 충북대 박물관 주임교수로 청주 생활을 시작했다.

국토와 산하 어디든 그에겐 유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금강·남한강유역의 구석기유적을 비롯한 선사유적 51개 유적을 조사·발굴해 국내·외 학계에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정과 집중력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융조 교수의 연세대 박물관부터 가와지 볍씨 박물관까지 50년 재직 기념호’라는 부제를 단 <博物館學報> 제29호(한국박물관학회, 2015.12)는 그의 공적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일제사의 식민지사관을 극복해 우리나라 역사의 상한을 단군시대(신석기시대)에서부터, 단군 이전의 시대(구석기시대)로 올려놓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구석기문화의 큰 체계를 비로소 세우는 데 기여했음. 특히, 청원의 두루봉 동굴·소로리유적·만수리유적·노산리유적 등과 단양의 수양개유적·구낭굴유적 등 동굴유적과 한데(야외)유적에서 큰 발굴성과를 올려, ‘중원문화권’의 정립에 큰 틀을 제공했음.”

그렇게 온 나라를 뒤지고 발굴하고 다닌 그이지만, 그가 가장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했던 학생들이다. 충주댐이 건설될 무렵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활동(단양 수양개 1차 발굴 조사를 위한 답사)을 벌일 때의 일화를 말하는 그의 눈가는 다시 촉촉해졌고, 잠깐잠깐 목이 메였다. 1980년 7월 20일부터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남한강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그는 내심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허기에 지친 학생들이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강을 건너 수몰 예정 지역인 수양개로 앞장섰다. 급류 속에서 배를 움직이던 노인 분이 ‘이런 날씨에 강을 건너는 건 미친 짓’이라고 역성을 냈지만, 학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지금은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는 우종윤 원장이 당시 학생대표였는데, 그를 불러 나루터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다음날 주변을 돌아보니 고추밭, 마늘밭, 감자밭 곳곳에서 ‘까만돌’이 보였다. 가만 보니 모두 석기였다. 수양개 선사 유적은 그렇게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 처음 학생들과 조그만 약속을 했어요. 무사하게 강을 건넌다면 분명 학생들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말이죠. 그게 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진 동력이었어요. 그런데 수양개 답사에 따라나섰던 학생들은 발굴 조사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들이 졸업하고 난 뒤에야 조사가 진행됐으니까요. 그래서 수양개 유적 발굴지에 박물관을 건립한 뒤, 입구 복도 오석에 함께 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어요. 그들이 없었다면, 수양개 발굴은 어려웠을 겁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발굴 현장에 기자를 보내진 않았지만, 타매체와는 조금 다른 기사와 사설을 냈다. 교육관을 지어 구석기 문화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교육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날의 사설이 하나의 지침이 됐던 거죠.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그의 손길로 중부고속도로 유적기념관, 단양 수양개선사박물관, 충주 조동리선사박물관이 건립될 수 있었다.

멈추지 않는 열정과 학문적 신념
열정은 박물관 건립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 나아가 유적을 기념하는 국제회의를 조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996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국제학술회의 ‘수양개와 그 이웃들(Suyangge and Her Neighbors)’이 그것이다. 오는 7월 26일부터 엿새 동안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제21회 학술대회가 열린다. 그는 국제학술대회 포스터를 보여줬다. 포스터에는 큼지막하게 한글로 ‘수양개와 그 이웃들: 수양개와 헬갭’이라고 표기돼 있었고, 그 아래 영어 표기가 붙어 있었다. 그가 설계하고 만든 ‘수양개와 그 이웃들’ 국제학술회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굴 현장을 누벼온 그에게는 학생들 말고도 평생 감사해야할 이들이 또 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던 아내(안정식 여사)와, 학생들의 답사 발굴 지원을 허락해준 동료 교수들이다. “발굴이란 게 딱 정해진 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고양 가와지볍씨 발굴 때도 예정 기한보다 9일을 더 초과했어요. 발굴 예산이란 게 뻔한데, 어디 가서 손을 내밀 수도 없죠.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뒤에서 도와주는 손길이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에요. 또한 동료 교수님들의 이해가 없었다면, 유적 발굴 조사는 어려웠을 겁니다. 학생들이 현장으로 빠져나가면 그 긴 휴강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죠. 그런데도 묵묵히 도움을 주셨죠.”

연구실보다 현장에서 땅을 파고 흙을 퍼다 나르기 바빴던 그였지만, 학회 활동과 박물관진흥법 추진 등에서도 의미 있는 결실을 거뒀다. 1970년대부터 친구 관계로 지내온 김정배(고려대), 문명대(동국대), 최무장(건국대), 강인구(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그는 고대사·고고학·미술사·인류학·신화학 등 다양한 분야가 참여하는 학회를 구상했다. 그 결실로 한국고대학회(1990)가 탄생했고, 한국박물관학회(1998), 호서고고학회(1998), 한국구석기학회(1999) 등도 만들어졌다. 학회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그는 근래 후학들의 학회 활동에는 깊은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고고학 분야가 많은 발전을 이룩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학회를 만들고 현장을 누비던 그 시절은, 지금보다 연구 여건이나 조건, 환경이 모두 열악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의 연구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는 거죠. 연구 환경이 좋아진 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학회 활동까지 더 좋아졌다고는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학회들을 만들고 방향을 정립한 세대로 봤을 때, 지금 학회활동은 글쎄요, 잘 모르겠더군요.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는 조금 말끝을 흐렸다. 비단 그의 분야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수몰지인 수양개 유적을 기한 안에 제대로 발굴하기 어려워 상대기관이 충청북도를 설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학회 설립을 위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며 십시일반 기금을 내놓았던 세대의 일원이었던 그, 그런 그가 보기에 지금의 대학과 학회의 모습은 분명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학자는 초심이 중요합니다. 큰 학자가 되라는 홍이섭 선생님의 말씀, ‘세계적 학자가 되라’는 용재 백낙준 총장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한 방향 인생길을 달려온 것이죠. 왜 유혹이 없었겠어요?(웃음) 그렇지만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약속대로 초심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준 학생들, 동료 교수님들께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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