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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서의 시민
방법으로서의 시민
  •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6.06.2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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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이런 나라에 계속 살고 싶은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는커녕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국가, 한일 간 위안부 협상처럼 제 민족은 거들떠보지 않고 타국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이상한 국가, 삼권분립은 온데간데없고 최고존엄의 안광만이 온 누리에 비치는 전제군주국, 반북과 반공을 내세우며 자유체제 수호를 외치지만 정작 개인의 자유권을 버젓이 침해하는 기형적인 자유주의 국가, 본연의 헌법정신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인지 민주적 기본질서인지 합의를 못 이룬 균열국가, 공공선과 법치주의가 사라진 허울뿐인 민주공화국,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다.

이와 같은 진단에 입각해 나름의 정치적 대안을 제시한 최신 도서가 진시원·홍익표의 공동저작 『왜 시민주권인가?』 (부산대출판부, 2016)이다. 이 책은 ‘시민’이라는 개념이 지닌 특유의 포괄성에 착안해 종래의 국가중심주의와 성장지상주의를 넘어선 참된 민주공화국을 설파한다. 여기서 시민은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각인된 ‘공민(citoyen)’에 가깝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서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공민인 시민은 국가 안으로 편입되기보다 오히려 국가 위에 서려한다는 점에서 ‘국민’과는 구별되며 개인적 욕망에 집착하는 ‘부르주아’와도 정치적 성격을 달리한다. 이처럼 시민 개념에 역사적·규범적 의의를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최근 들어 우리학계에서 하나의 지적 흐름을 이루고 있다. 신진욱, 『시민』(책세상, 2008), 송호근, 『시민의 탄생: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지각 변동』(민음사, 2013), 정상호, 『시민의 탄생과 진화』(한림대출판부, 2013), 그리고 박명규, 『국민·인민·시민: 개념사로 본 한국의 정치주체』(소화, 2014)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사회학자 신진욱이 제시한 자유로운 시민, 연대하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이라는 세 가지 이념은 『왜 시민주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의 방향을 설정해준다. 시민 개개인의 자유, 생명,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동시에 시민적 결사체를 활성화시켜 시민적 덕목을 배양하고 시민이 우위에 서는 다원주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이 책은 시민과 시민권 개념이 실행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다각화되고 풍성해질 수 있으며 심지어 국가와 영토의 경계까지도 뛰어넘어 세계시민과 지역시민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남는다. 여기서 시민주권은 국민주권을 보완하는 개념으로, 유서 깊은 인민주권 개념과 친연성을 지닌다. 평범한 시민이 그저 유권자의 자격을 얻은 채 선출된 정치인과 심각한 괴리를 빚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제 시민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나서서 국가와 시장의 폭주를 직접 통제해간다는 발상은 꽤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시민 개념의 지평을 국민의 경계를 넘어 인민이라는 의미로 확장한다 해도, ‘주권’이라는 용어와 결부되는 순간 권력의 근본적 갈등구조에 엮여들지 않을 수 없다. 인민이나 시민이 주권자로 등장한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국적이나 이념적 가치 등 일정한 자격조건을 채우는 동질적인 권력집단의 모습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주권이란 본래 법의 효력중단까지 결정할 수 있는 최고 통치권을 의미하지 않는가. 권력의 얼굴을 갖지 않는 시민주권이라면 그것은 자동기계가 만사를 알아서 결정하는 섬뜩한 유토피아의 원리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추상적인 원칙론에 머물지 않고 시민주권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다. 시민이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고 감시하는 시민국 신설, 시민배심원제도의 전국적 확대 적용 등 풀뿌리 자치와 거버넌스, 참여 민주주의를 진작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시민이 주도하는 다원주의 국가는 여전히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이기 쉽다. 그 다수를 국민이라 부르든 민중이라 부르든, 인민 혹은 시민이라 부르든, 이들이 행사하는 주권이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간에, 다수민의 주권은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갖지 못한 소수자의 인권과는 큰 간극을 보인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목도하건대, 다수의 국민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흔히 “국민이 회초리를 드셨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힘을 얻지만 정작 회초리를 맞아야할 것은 국민 자신이다. 어쩌면 이 나라에서 통치자와 피치자는 괴리돼 있기는커녕 욕망의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이 땅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서로 힘을 합쳐 거악을 막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시민적 연대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알려진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난민을 방어하는 방식을 보면 다수자의 주권과 소수자의 인권을 접목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은 분명하다. 시민주권론은 완벽한 이념적 대안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꽉 막힌 현실을 타개할 정치적 전략을 모색하는 방법론으로서 충분히 토론해볼 가치가 있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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