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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다스, 후마니타테 코레아나?
쿠오 바다스, 후마니타테 코레아나?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 승인 2016.06.2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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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인문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사람(vir bonus)’ 기르기다. 퀸틸리아누스의 말이다. 이는 동양에서도 통용되는 말이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문제이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다. 여러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가정교육도 있고, 학교교육도 있다. 그런데 가정교육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나 가능한 교육모델이 아닌지 싶다. 현대 사회의 직업 구조가 아버지의 경험과 지식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저런 이유에서 아버지가 교육적 모범이 되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학교교육은? 이는 더욱 심각하다. 단적으로 시험 탓이다. 입시 체제의 중등 교육 과정에서 인성 교육을 요청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짓일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도대체 ‘좋은 사람’은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실은 ‘Quo vadas, humanitate?’의 답이다. 물음에 대한 답이 물음이라니!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르겠다. 해서, 좋은 사람 기르기의 방안을 처음 제안한 퀸틸리아누스의 조언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모방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모방하는 법이다. 문제는 모방할 만한 좋은 사람이 역사적으로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검증된 좋은 사람을 담고 있는 그릇이 책이다. 좋은 사람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고전이다. 퀸틸리아누스의 말이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키케로가 당대 법정을 군림했고, 혹은 후대 사람들로부터 키케로라는 이름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연설의 대명사로 일컬어졌는데, 이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키케로를 우러러 봐야 할 것이고, 이를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며, 키케로를 몹시 따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 자는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진일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사학 교육』 제10권 1장 112절)

좋은 사람은 개인적인 성품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은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서 행해야 할 좋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가족의 가장으로서, 조직의 리더로서, 국가의 수장으로서 행해야 할 좋음이 있다. 이는 개인 성품의 좋음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도덕과 윤리 차원의 좋음도 함께 중요시되고, 아울러 능력의 탁월함도 동시에 요청된다. 여기에는 도덕과 윤리의 좋음도 함께 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여러 차원에서의 좋은 사람의 모방이 필요하다. 이것이 교육의 요체다.

가족 범위의 모방 단계를 뛰어넘어 국가 사회 차원에서 그리고 인류사적인 차원에서 좋은 사람을 모방하는 방법은, 직적 대면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 한, 대부분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 접할 수밖에 없고, 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따라서 인성교육의 본체가 고전 교육이다. 또한 인성교육을 개인적 성품의 교육을 넘어서는 지평으로 확장시켜 사회적 인격의 함양까지 포함시켜야 하는데, 이를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퀸틸리아누스는 좋은 사람을 담고 있는 책, 즉 고전 읽기를 제안한다.

문제는 고전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 의견이 가능하지만 지면 관계상, 고전 읽기를 교육 모범으로 제시한 퀸틸리아누스의 생각을 소개하겠다. 그에 따르면, 고전이란 다섯 기준을 충족한 책을 말한다.

첫째는 시간의 검증을 견뎌낸 책이다. 당대의 취향과 유행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말이다. 둘째는 유익해야 한다. 당연히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는 그렇다고 반드시 옛날 책일 필요는 없다. 넷째는 탁월함이다. 최고의 시인, 연설가, 역사가, 철학자를 읽는 것이 좋다고 한다. 마지막은 표현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한다. 말이 때로는 인품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고, 말이 때로는 능력을 발휘케 하는 수완이기 때문이란다.

퀸틸리아누스가 고전 읽기를 강조한 이유가 이 점에서 해명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전 읽기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기르는 데 무게 중심을 둔 교육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전은 좋은 시인이, 탁월한 철학자가, 솜씨 좋은 기술자가, 특정 시대에 밝은 전문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퀸틸리아누스에게 고전이란 좋은 연설가가 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그런데, 좋은 연설가란 좋은 정치가이자 좋은 시민을 뜻한다. 여기에서 고전의 쓸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교양의 함양이었다. 물론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데 요청되는 소양의 함양에도 도움이 되는 무엇이 고전이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서양의 현대 교육이 퀸틸리아누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 고대가 엘리트만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서양의 현대 교육은 대중교육과 엘리트교육이 잘 어울러져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교육 선진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도 바로 이것이다.

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한국의 중등 교육은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한국 대학들은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엘리트 교육이 없다는 점을 말이다. 그렇다면 보통 교육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이도 아니다. 아이들이 시험 성적만을 위해 학교 수업은 물론 학원 강의를 통해서 답안지에서 정답과 오답을 골라내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중등교육의 실상 아닌가?

도대체, 저 망할 놈의 ‘다음 중 아닌 것은?’ 따위의 문제를 만든 자는 과연 누구일까? 정답만을 골라내는 혹은 오답을 피하는 연습이 아이들의 인생을 위해 습득해야 할 능력일까? 설령 이런 반복 훈련을 통해서 명문대학에 진학했다해서 이런 교육 방식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골라내기 연습일까? 어쩌면 우리 교육은 공교육과 사교육 분야 모두에서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에 와서도 과외를 받는 세상이 돼 버렸으니 말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 안의 자기를 발견할 때부터 시작된다. 그 발견은 스스로 설 수 있게 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엄마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서는 일이 가능할까? 스스로 설 수 있음은 是是非非를 스스로 가릴 줄 아는 자기 판단 능력을 갖출 때 가능한데, 그 시시비비를 엄마가 대신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적어도 자기 판단 능력이 ‘다음 중 아닌 것?’을 골라내는 연습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정반대다. 인생에는, 삶의 현장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매순간 정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모범 정답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 상황에서 정답을 찾고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도 실은 ‘Quo vadas, humanitate?’에 대한 또 다른 답이다. 어쩌면 이곳일 것이다. 한국인문학이 가야하는 곳이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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