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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거리 활보하던 ‘모당뽀이’ 생생히 재현 … 월북 후 박태원 행적 문학사적 교정도
명동거리 활보하던 ‘모당뽀이’ 생생히 재현 … 월북 후 박태원 행적 문학사적 교정도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6.20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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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복원한 아버지 구보(박태원)의 일생
▲ 좌로부터 김소운(소설가), 이승만(미술가), 박태원(소설가), 정인택(소설가). 박태원은 훗날 죽마고우인 정인택의 아내 권영희와 북에서 재혼한다. 출처=http://blog.daum.net/danielpak20

 박태원과 열두살까지 함께 살다 전쟁 때 헤어진 아들 박일영은, 소소한 에피소드, 의문에 싸여 있던 월북 이후 박태원의 삶과 창작 활동을 집요하게 재구성해낸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천변풍경』의 작가이자 근대 식민지 도시의 모던보이였던 박태원이 월북해 ‘북쪽’에서 失明 상태에서도 작품 집필에 몰두하다 세상을 떠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2016년은 박태원의 30주기이기도 하다. ‘소설가 구보씨’ 박태원의 맏아들 박일영이 월북 이후 물음표로 남은 아버지의 행적을 좇으며 일생을 재구성한 회고록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문학과지성사, 376쪽, 16,000원) 출간은,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구보 30주기에 맞춘 ‘思父曲’이지만, 문학사적으로는 복원되지 못한 한국근대문학의 한 상징에 관한 기억맞추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기억은 좀 더 정치한 해석과 평가에 의해 조율돼야 하겠지만, 문학 연구자가 아닌 구보 직계에서 이 작업이 나왔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시사적이다.

박태원과 열두 살까지 함께 살다 전쟁 때 헤어져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 아들 박일영은, 구보의 아들이어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소소하고 내밀한 에피소드, 그리고 의문에 싸여 있던 월북 이후 박태원의 삶과 창작 활동을 집요하게 추구해 재구성해낸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동료 문인들과 경성의 명동을 활보하던 ‘모당뽀이’ 박태원의 사적인 삶과,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북에서의 발자취, 병중에도 소설을 놓지 않고 국민 작가가 된 박태원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크게 3부로 구성한 이 책은, 저자가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학문적 성과를 분석하기보다 자신과 12년간 함께한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을 함께해야 했을 ‘아버지’ 박태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음사에서 편집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가 공부를 마치고 어느덧 은퇴하게 된 아들은 도서관에서 아버지의 자취를 찾기 시작한다. 동생 ‘재영’이 모은 자료들을 참고해 옛 문헌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며 문학적 흐름과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고,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에 수차례 참석해 구보의 북녘 가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곳에서의 삶을 짐작해낸다. 그렇게 모아낸 수십 년치 기록은, 박태원의 외손자인 영화감독 봉준호의 말대로 ‘아름답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또한 박태원 특유의 문체를 닮아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긴 문장과 그 안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서울 사투리’는 읽는 맛을 배가시킨다.
도대체 열두 살 아들은 아버지 구보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아들이 그려낸 아버지 박태원의 사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박일영 씨가 재구성한 장면 몇 가지를 따라가 본다.

-탄생
구보 박태원은 1909년 12월 7일, 경성부 다옥정 7번지에서 약종상인 朴容桓을 부친으로, 남양 홍씨를 모친으로 하여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등에 오새 10원짜리 동전만 한 점이 있어 点星이라 불렸다는 데, 호적을 살펴보니, 형 震遠도 아명이 있어서 昌星이라 했다. 구보는 이 이름을 학령이 될 때까지 그대로 사용했던 모양이나, 당신은 단 한 번도 그 이름에 대해 언급을 하신 일이 없다. 당신이 손수 쓰신 일곱 살 적 얘기에서도, 약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를 때 ‘태원아, 태원이’만 연발했다고 하는 걸 보면 점성이란 아명은 집안에서조차 쓰지를 않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당신은 그런 아명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던 건지……
구보네 집안은 조부(필자의 증조부) 시절부터 양약방을 하더니 부친(필자의 조부)이 약종상이 약종상이 되셔서 共愛黨藥房을 경영하고, 숙부(필자의 종조부)가 양의로서 공애의원을 아래윗집에서 개업했다. 그리고 딸 하나 있는 거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여고)에서 공부시켜 신식 여성으로 이화고녀 선생을 만들었으니, 일찌감치 개화한 ‘중인집안’이란 약삭빠른 소리를 들어도 싸다. 하지만 정말로는 ‘한다하는 양반집 출신’이지 구보가 ‘중인 출신’이란 말은 천부당만부당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다. 이참에 아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13~17쪽)

-아내와 첫 만남
어머니가 숙명고녀를 다니고 아버지는 아직 제일고보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 아마 1929년 어름해서일 것이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영어 연극을 하게 되었단다. 한데 제일고보 상급생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공연 날짜를 맞춰 구경들을 왔다는데, 그날의 히로인은 단연 어머니 정애 양이었고, 구경 온 제일고보 학생 중엔 구보도 끼어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고보 학적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어학, 특히 영어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고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
[……] 한데 뒤에 어머니로부터 나온 얘기로는 ‘그중에서 주역을 맡았던 여학생이 그래도 제법이더라’하는 평을 달았다니, 이미 구보는 미래의 신붓감을, 학창 시절의 영어 회화 실력으로써 점검한 셈이 된다.(73~74쪽)

-친구를 빼앗긴 李箱
가장 먼저 피로연장에 현신을 한 것은 역시 구보의 결혼을 가장 가까이에서, 물론 축하를 해줘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염려를 했던 이상이다. 허구한 날 붙어 다니며 문학을 하던 이상으로서는, 그의 천재적 예감이 그를 괴롭혔는데, 그게 무언고 하면 혹 구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기와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지나 않을까 한 것이다. 그래서 붓을 들도 내리갈긴 첫마디가 ‘구보, 여보게, 결혼은 하더라도 이 둘도 없는 친구 버리지 마시게……’ 하는 마음에서 ‘面會拒絶反對’였는데, 그의 예감은 적중을 하여, 구보는 신혼 재미에 한동안 두문불출이었단다. 箱은 늘 하던 대로, 예의 그 다방굴로 사흘을 거푸 찾아가 구보의 창문 아래서 구보를 불렀으나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나흘째는 손이 아프게 창문까지 두드렸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니, 사랑으로 방음장치(?)가 잘 된 들창이 열릴 리가 없었으리라.(80쪽)

-붙들려간 아버지
그러던 중 세상이 바뀌고 사흘째, 1950년 7월 초하루 낮때쯤 해서, 두 마리 거위가 목을 땅으로 길게 내리깔며 꺽꺽거리고 개가 사납게 짖는 속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다. (……) 손님은 키도 크지 않은 이가 깡마른 데다 머리를 치켜 깎아 단정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위가 올라붙은 게 성깔이 있어 보였는데, 미소조차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지는 데다 갓 서른을 넘겼을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가 아버지를 대하는 품은 아주 정중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대화가 있은 후 아버지는 외출 준비를 하시며 엄마와 몇 마디 짤막한 말을 주고받은 뒤에, 눈이 똥그래진 우리들을 뒤로 하시고 그 젊은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193~194쪽)

-종신형 언도받은 어머니
어머니에게 종신형을 내릴 만큼 무거운 罪狀이란 것이 ‘이적행위’다. 지아비의 방패막이가 돼야 했던 사정으로 마지못해 여맹 일을 본 일이 세상이 바뀌자 ‘부역’이란 대역죄로 둔갑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남들보다 학벌이 있어 여맹 부위원장 자리가 주어졌고, 전세가 뒤집힐 무렵엔 위에서 시키는 통에 할 수 없이 성북 제2지구 반원들로부터 빨랫비누 스무 장을 거둬, 인민군 군복 70착(벌)을 주민들과 함께 빨아주었다. 그리고 그 세탁한 군복에 견장을 달아주었다는(짐작건대 견장 속에 마분지가 들어 있어 세탁을 하려면 견장을 뗐다 나중에 제자리에 꿰매 달아야 했었나?) 일이, 어머니가 1950년 7월 25일부터 동년 9월 27일까지 두 달 남짓한 적치하에서 저지른 ‘이적행위’의 전부였다. (221쪽)

-40년 만에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
아버지는 올라가시자 전세가 불리해져 곧 종군작가단에 편성돼 낭림산택 줄기를 따라 후퇴하다가 혜산진까지 밀려간 모양이다. (……)
나는 1990년 방북 때, 당시의 얘기를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말로 40년 만에야 평양 광복거리 큰누나의 아파트에서 들을 수 있었다. 고모와 동행한 큰누나는 두어 달을 고모가 배속돼 있던 부대의 전령으로 뛰어다니며 북으로 쫓기다가 1951년 2월 하순께에야 혜산진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누나에게서 남에 남긴 가족들의 소식은 들었지만, 당시는 이미 종군작가로 신분이 바뀌어 군관복 입은 군속(군인?)으로서, 상부 명령에 따라 전선을 누벼야 했기에 일껏 만난 부녀는 다시 헤어져야만 했다. (232쪽)

-죽마고우의 아내와 재혼하다
1956년 코스모스 필 때, 구보는 사변 중 북행길에서 사라져버린 죽마고우 ‘태양이’ 정인택의 아내, 권영희 여사와 재혼을 했다. 1990년 방북 때 새어머니에게 6·25 당시의 그 댁 사정을 물었더니, 역시나……, 듣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정인택 선생은, 북에서 진작에 처리가 끝난 친일 문제도 아마 묵직하게 걸려 있었을 테고, 그래서 인공 때는 아버지보다 더, 아주 오래 조사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잇다. 아무려나, 부인과 두 딸은, 우리처럼 9·28 서울 수복 직전에 통기를 받고는, 우리처럼 엄두를 못 내거나 하는 일 없이 서둘러 북으로 갔으나, 정작 먼저 올라가 있어야 할 양반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단다. 하기야, 난리 통에 이런 분들 어디 한둘인가? 그래 결국 여사께서는 6년을 기다리다 아버지와 합치게 된 것이다. (252~253쪽)

-제3차 남로당파 숙청과 문화계
항간에는 구보가 이 파동에 함경도로 쫓겨가 인민학교 교장을 하고 있다는 둥, 어느 지방 인쇄소에서 교정을 보고 있다는 둥 하는 소리가 돌았다. (…) 아버지와 만 30년을 함께하신 새어머니 권영희 여사는 아버지가 정치적인 제재로 평양을 떠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셨다. 남북 관계가 한창 악화되던 때는 평양 시민을 백만 명으로 줄이고자 일종의 소개 차원에서 현장 학습을 감행(?)한 적이 있었나 보던데, 아버지는 심지어 그때도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 누구라도, 아버지 박태원은 본의 아니게 평양 시찰차 북에 갔다가 전세가 불리해져(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그곳에 남게 된 작가로서 월북 후 6개월간 ‘집필 금지’를 받은 일 이외에는 어떤 제재도 받는 일 없이 창작에만 열과 성을 쏟았다는 데 이의를 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280쪽)

-구보 잠들다
구보는 1986년 7월 20일, 음력으로는 6월 4일 저녁 9시 30분에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남에서도 평양방송을 인용한 ‘월북 작가 박태원의 사망 소식’이 방송과 일간 신문에 보도된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갑오농민전쟁』 제3부가 권영희와 박태원 공저로 출간됐다.(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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