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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부 없애고 연구 자율성 권장 … 연구원들, 박봉에도 더 자발적으로 일했다
출근부 없애고 연구 자율성 권장 … 연구원들, 박봉에도 더 자발적으로 일했다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6.06.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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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8. 행과연의 연구풍토
▲ 1974년 10월 12일, 경기도 여주 영능을 찾은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들. 사진 속에서도 이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진제공=이성진 교수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는 연구 수행에 있어서 자율을 높이 권장한 곳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일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자율이 연구소의 모토였다. 그것은 여느 연구소와 다름없이 전문가로 뭉쳐있는 집단이라면 보장해야 하는 가치였다. 흔히 듣는 진부한 자율이란 말을 KIRBS의 신조로 삼는 것이 새삼스럽다. 딱히 자율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관습의 틀이나 격식을 벗어나서 파격이 허용되고 권장된다고 ‘자율’을 수식하고 이를 연구소의 행동원칙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연구소 운영 책임을 맡자 나는 어차피 자리에 합당한 역할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연구소의 행·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내막을 알지 못했고 연구소 일을 내 뜻대로 결정하고 처리해도 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연구소 운영을 맡은 뒤 나서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지자 나대로의 요령을 부리게 됐다. 연구원들이 무슨 일을 가지고 오면 나는 기관 운영에 능숙한 척 주저하지 않고 나의 ‘탁월한’(?) 결단력을 과시하곤 했다. 어디서 그런 꾀가 났는지 웬만한 일은 거리낌 없이 척척 용맹스럽게 결정하곤 했다.

책임을 맡았으니 운영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별 고민 없이 내 평소의 소신대로 하기로 했다. 연구소를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나는 연구소 안팎에서 내가 하는 일에 가타부타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 정범모 회장도 원래 약속대로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이 낌새를 채고 나도 큰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KIRBS의 모토가 자율이라면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출근부를 없애라, 도장을 찍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선언했다. 이런 시스템을 ‘자유근무시간제(flextime)’라고 하는데, 나는 이런 것이 있는지를 그 때는 몰랐다. 시행규칙은 오직 한 가지.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출근, 오후 3시에서 7시 사이에 퇴근. 자기 편한 대로 출퇴근하도록 한 것이다. 그때 어떤 연구원은 이를 보고 무슨 포고령 같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의 대부분의 기관에서 출근부 제도를 운용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가 출근부를 없앴다.’ 어느 일간 신문이 사회면에 크게 보도했다. 우리 연구소의 결정이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보도가 나가고 며칠 뒤 연구소에 자주 오가던 그 신문사의 기자가 괜찮겠냐고 걱정하는 전화를 걸어 왔다. 이 기자는 말려도 자진해서 내 몫까지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자칫 기율을 무너뜨려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염려된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염려를 하던 참이었다. 약속한 것을 금방 거둬들일 수는 없는 노릇.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교통난이 심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연구원들은 대환영이었고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그렇지만 연구원들은 맡은 일을 아무런 차질 없이 해내고 있었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는 듯했다. 연구원 모두가 연구에 대한 프로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라는 그들에 대한 나의 신뢰가 먹혀들어 간 것이다. KIRBS의 자율은 所訓처럼 미리 정해 놓고 지켜야 할 행동원칙이 아니었다. 연구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었고, 소장은 그저 타는 불에 기름 끼얹듯 그것을 부추긴 결과였을 뿐이다. 연구 활동이 즐거워지고 생기가 돌았다.

출근부를 없앤 뒤 자율이 먹혀들겠다는 낌새를 챈 나는 내친김에 이미 연구소 관행이 돼있던 몇 가지 일에까지 자율의 바람을 좀 더 불어넣기로 했다. 우선 연구 수행에 있어서 연구원의 자율성을 더욱 부추기기로 했다. 연구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연구원들은 프로젝트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분명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식적으로 상당한 자율을 허용했다. 또한 연구책임자의 책임이 어느 누구보다 무겁기 마련이므로 연구내용과 방법을 수정하는 자유와 여유를 충분히 줘야 했다. 이런 자율은 가끔 실패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더러 기대하지 않은 예상외의 희한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우리의 연구에서는 가끔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가 돼 나올 때가 있었다. 이럴 때 그것을 문책하거나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우연한 발견, 기대하지 않았던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산출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뜻밖의 발견(serendipity)’을 환영했다. 연구 수행의 자율이 보장되고 권장되는 분위기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릴 때 연구에 대한 열정이 충천하는 듯했다.
KIRBS의 이런 자율 분위기는 연구원 간의 인간관계의 역동적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언제부턴가 우리 연구소에는 연구원들 간의 위계를 나타내는 上·下가 사라졌다. 부장, 연구원, 인턴 등의 직함은 있었지만, ‘~님’자를 붙여 부르지 않았다. 모두 김 선생, 박 선생으로 통했다.
세대 간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위’ 세대와 ‘아래’ 세대의 차이다. 전문인이 모인 KIRBS는 위계가 분명하지 않았고, 수평적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위계질서는 아예 없었다. 윗세대는 신지식을 갖춘 아랫세대로부터 심리적 위협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희석하기 위해 권위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윗세대는 지혜로 아랫세대를 격려하고 감싸줄 수 있어야 했다.

우리 연구소에는 연구원들 간의 상호학습 관계, 경험을 나누고 공유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런 조직풍토가 세대 간의 갈등을 누그러트렸고 연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가 자주하는 세미나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 한 예를 적어 본다.
당시 인턴으로 있던 강태중 씨(현 중앙대 교학부총장)가 한 집단모임에서 자신의 감상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적은 적이 있다. 자신의 공식적인 직함은 인턴이었지만, 인턴들은 모두 연구원과 대등하게 취급됐다. 여럿이 모여 관념화(ideation)할 때 인턴들도 선배들과 함께 참여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소견을 발표하도록 소장이 배려했다. 이런 분위기가 “인턴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했고 학자들이 하는 일을 하는 듯, 그리고 곧 위대한 연구업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했다”고 강태중 박사는 말했다. 상하를 따지지 않는 풍토에서 연구원들 스스로 자율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부추기는 분위기가 생동감 넘치는 연구 집단을 만들었다.

KIRBS의 자율이 가져다준 또 하나의 망외의 소득은 연구원들의 자발적 논문 발표였다. 연구소에는 연구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하는 <行動科學硏究(Research Bulletin: RB)>와 연구 아이디어나 개인 연구를 발표하는 ‘리서치 노트(Research Note: RN)’가 있었다. RB는 연구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결과를 발표하는 보고서다. ‘리서치 노트(RN)’는 연구원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루트(route)였다. 연구 아이디어가 있으면 언제든지 주저하지 말고 그것을 발표하도록 권장했다. 이 ‘리서치 노트’는 정범모 회장이 연구소 창립 당시부터 권장했던 것이다. 연구소의 자율적 연구 분위기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것을 글로 써서 함께 읽어나가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엮어 내는 창의의 과정. 부담 없이 써내는 것이 연구의욕을 드높이는 자극제가 됐다.
내가 있는 동안 RB가 200여 편, RN이 160여 편 발표됐다. RB 가운데 반 이상이 RN에 속하는 논문들이었고, RN중에도 완전한 논문 형식을 갖춘 것들도 많았다. 나는 ‘리서치 노트(RN)’에 더 애정이 간다. 연구원들이 자발적으로 쓴 반짝반짝하는 보석 같은 글들이었다.

연구소에 자율의 바람이 불게 되면서 어느 순간, 분위기가 너무 나가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함이 넘쳐나서 연구소 내에서의 연구원 행동이 너무 해이해져가는 듯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연구소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걸스카우트 빌딩 4, 5, 6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1973년 석유파동이 닥쳤다.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기름 값이 올라 난방이 부담돼 책상을 연구실 남쪽 볕바른 쪽으로 옮겨 일하자고 했다. 이것이 단초가 됐다. 사무실 북쪽이 비게 되자 쉬는 시간에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동전 따먹기’를 했다. 신입 연구원이나 인턴, 그리고 자문 교수들까지 모두 이 ‘행사’에 동참했다. 노익상 연구원(현 한국리서치 회장)이 조직책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뒤 늦게까지 이 게임은 계속되곤 했다. “소장님도 한 번 하시죠” 하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 뒤 소장이 동전 따먹기 한다는 소문이 연구소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다 이 게임이 시들해지자 노익상 연구원은 ‘탁구도사’ 김철수 연구원(계명대 명예교수)과 홍성열 연구원(전 강원대 교수)과 함께 빌딩 옥상에 버려져 있던 탁구대를 갖고 내려와서 ‘사무실 탁구장’을 만들어버렸다. 사무실 탁구장은 금방 성황을 이뤘다. 자유근무시간제가 도입돼 연구소 한쪽에서는 일을 하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탁구를 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나도 한번 탁구를 쳤다. 근무시간에 소장이 연구원과 탁구를 친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 중심부의 한 유수한 연구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것은 카오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율이란 이름 아래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KIRBS 풍토는 한정 없이 느슨하게, 멋대로, 어중간하고 자유로웠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파격적이라고 해도 되고, 기율이 없다고, 불합리하다고, 심하게는 엉터리라고 해도 된다. 나의 느슨한 방식에는 ‘연구소에서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발성과 자율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연구원을 ‘관리’하기보다는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는 조직문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연구 자체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야 하지만 思考에는 꽉 조인 틀이 아닌 약간의 장난기가 있어야 창의성이 발생한다고 나는 믿었다.

우리의 연구 분위기가 느슨하고 매가리가 풀렸다고 해서 우리 연구원들이 일을 태만하거나 대충 때우려고 잔꾀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박봉의 급여에도 불구하고 연구원들은 훨씬 더 자발적·적극적으로 분발해 일했고, 이런 모습은 내게 진한 감동을 가져다줬다.
나는 연구소의 자율성이라는 신조가 장기적으로 연구소와 연구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막연하지만 확신은 있었다. 소박한 생각이었다. 자유롭게 생각하라, 소신껏 행동하라, 그리고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라. 이렇게, 아이들에게 말하듯 연구원들에게 마음속으로 바랐다.
연구원들은 딱딱한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소장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에 익숙해졌다. 내가 어깨에 힘을 주고 권위를 내세웠다면 KIRBS라는 사설 연구기관은 아무리 전문가 집단이라고 해도 자유분방한 창의적인 연구 분위기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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