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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 시대 재조명 눈길 … 국가의 역할 고민한 기획도 신선
正祖 시대 재조명 눈길 … 국가의 역할 고민한 기획도 신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6.14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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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계간지 리뷰

왜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삶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가.

아니 그런 질문 자체가 타당하기는 한 것인가. 애초 국가는
그 국민들을 위계화, 타자화시키면서 거기에 부합하는 차별적 내용과
형식으로 그들의 삶과 안전을 구획해온 것은 아닌가. 바로 여기서
고답적으로 보이는 질문 속에 내재한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여름 계간지들이 무더위와 함께 일제히 서점가에 꽂혔다. <역사비평> 115호는 특집 「도시로 읽는 1949년 이후의 중국①」과 기획1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 ①정조시대의 다학문적 접근」, 연속기획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②」을 들고 나왔다. 솔직히 재미있게 보이는 것은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다. <황해문화> 91호는 특집으로 「‘국가라는 환상’을 넘어서」를 준비했다. 여기에 이어 기획에서도 「두 문제국가 사이에서」를 조명했다. 둘 다 현재형 과제에 대한 성찰이다.
반면 문학을 중심에 둔 계간지들, <문학동네> 87호는 특집으로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을 준비했다. <오늘의 문예비평> 101호는 특집 「문학장의 지각변동」을 실었는데, 이는 <창작과비평> 172호의 특집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와 함께 읽어보기 좋다. 특집 기획을 뜻밖의 것에서 찾은 곳은 <문학과사회> 114호다. 이들은 기획 「루카치 재장전: 『소설의 이론』 백 주년에 부쳐」를 마련했다. 헝가리의 마르크스 문예이론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조금 특별하게 기념하는 동시에, 그의 『소설의 이론』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짚어보겠다는 의도다.

「책머리에」에 ‘20대 국회에 바란다’는 공개 서한을 띄운 <역사비평>은 새 국회가 국정교과서 제도를 다시 검인정으로 돌려놓을 것을 요청하면서, 대학교육 정상화와 대학 구조조정 재고를 강력 주문했다. 이들이 기획한 정조시대 재조명은 “조선 후기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다. 「총론: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이경구),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최성환), 「정조의 자연·만물관과 공존의 정치」(박경남), 「정조시대 다시 보기―천문사의 관점에서」(전용훈) 등의 글이 실렸지만, 논의는 앞으로 더 이어질 전망이다. 이경구는 ‘총론’에서 정조와 19세기를 연속과 단절의 문제에서 조명하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정조시대의 다학문적 접근에 이어 2회차에서는 정조와 세도정치, 3회차에서는 세도정치기의 이질적 시공간 등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군주였지만, “정조가 지녔던 장점 이면에는 왕조, 전제, 공작, 이데올로기의 억압 등의 어둡고 습한 영역이 존재함을 항상 주시해야 한다. 이제 철지난 것들이라고 긴장을 늦추는 순간, 그것들은 정조의 등에 슬그머니 업혀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대목이다. 왜 정조를 응시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근미래에 도래할 포스트휴머니즘
<황해문화>의 기획은 늘 현실에서 출발해서 현실로 되돌아오는 접근을 보여준다. 특집 「‘국가라는 환상’을 넘어서」 역시 그렇다. 「세월호 이후의 국가」(최원), 「국가와 마이너리티: ‘상기’하는 방법을 생각하며」(김원), 「국가와 아버지: 자수성가에 대한 두 개의 판타지」(김지미),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장덕진), 「세월호와 함께 살아가기」(김명인) 등의 글을 실었다. 그런데 이들은 어째서 이 ‘고답적’으로 보이는 질문을 던진 것일까. 편집위원 이광일은 다음과 같은 설명 속에서 이들의 문제의식을 쉽게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왜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삶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가. 아니 그런 질문 자체가 타당하기는 한 것인가. 애초 국가는 그 국민들을 위계화, 타자화시키면서 거기에 부합하는 차별적 내용과 형식으로 그들의 삶과 안전을 구획해온 것은 아닌가. 특히 지금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라는 국가형태는 애초 그 구성원 가운데 ‘일부’의 삶과 안전의 박탈을 전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그 ‘일부’에 포함되지 않으려 각자도생의 사투를 벌이는 한편, 다양한 소수자의 존재와 삶의 방식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 배제,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

특집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을 들고 나온 <문학동네> 87호의 기획 의도는 편집위원 문강형준의 펴내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 트랜스휴머니즘과 다른 지점은 후자가 과학기술을 통해 증강되는 인간의 능력을 희망하는 데 반해, 전자는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판타지’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며 새로운 존재론적 화두를 제시하려고 한다. 인문학은 이제 기계와 사물과 동물을 포함한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구체적 문제들을 탐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사유할 때가 됐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글들은 「포스트휴머니즘, 기술생성, 디지털 기술: 캐서린 헤일스와의 대담」(홀거 푀츠시·N. 캐서린 헤일스), 「포스트휴먼 시대의 포스트휴먼 담론드리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이경란),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탈)인간학: 기계와 인간의 공진화를 위한 사회적 존재론」(최진석), 「디오라마와 컨슘션」(윤재민) 등이다.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N. 캐서린 헤일스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기존의 자유주의 휴머니즘 주체론을 해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창작과비평> 172호는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를 특집으로 준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편집위원인 이남주 부주간은 “작금의 팍팍한 현실은 어떠한 미래의 삶도 기대하기 힘들 만큼 전망이 어둡고 굳게 닫혀 있는 듯하다. 한국문학도 전반적으로 이를 반영한 듯 좀처럼 희망의 근거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려운 현재의 삶을 힘겹게 감당하며 미래에 이르는 문을 닫아걸지 않으려는 예술적 분투가 진행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특집에 묶인 글들은 오늘의 한국문학이 엄혹한 민중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힘든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를 다양한 방식으로 논한다.”라고 말한다. 같이 실린 글들은 「리얼리티 재장전: 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강경석),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한영인),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시」(양경언), 「‘헬조선’에서 ‘탈조선’을 꿈꾼다는 것」(소영현) 등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강경석의 글은 ‘민중문학론’ 재점화론이다. 민중성과 리얼리티 문제를 중심으로 오늘의 문학현장을 폭넓게 점검하는 한편 한국문학이 어떻게 ‘미래를 도모’해나갈지를 숙고했는데, “계급과 성별, 인종과 국적의 어느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해지는 복수의 사회·문화 현상들을 통합적 시야로 포착할 필요가 있다면 민중담론을 리부트(reboot)할 이유는 충분한 듯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이 선 듯 와 닿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가 ‘민중적인 것의 요체’를 강조하고, 거기서 ‘다른 세상’을 여는 힘이 나온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기시감 가득한 80년대 문학론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  출간 백 주년의 의미
<오늘의 문예비평> 101호는 섣불리 ‘한국문학’의 미래를 언급하기보다 한국문학이 서 있는 ‘문학장’ 문제를 더 고민하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문학과 돈」(조재룡), 「저항담론으로서의 ‘지역문학’을 다시 말하다」(강동수), 「로컬 트러블: 지역, 불화, 비평」(박형준), 「화해불가능한 비평-지역/문예지와 근대의 이중성」(양순주) 등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문학장에 대한 관심은 매우 이론적이거나 소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제도적 구성물로서의 문학’이 관계 맺고 있는 가장 내밀한 부분을 가시화하는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역’을 중심으로 생존을 모색하는 문예지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 겨냥한 ‘지역 기득권의 상징폭력’을 확대하면 한국문학 전체 지반을 위협할 수 있는 거악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강동수의 고민이 경청할 만하다. 그는 부산문학이 중심부 문학의 삼투압에 빨려들어가 ‘중앙적 아류’를 생산하는 데 급급하다고 비판하면서, 지역문학의 운동성 회복을 위해 무크지 운동을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2016년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출간 백 주년이 되는 해다. <문학과사회> 114호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청년 루카치와 그의 이론을 ‘새삼’ 돌아보는 기획을 들고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대하여」(프랑코 모레티), 「루카치 『소설의 이론』 세 번 읽기」(서영채), 「마르크스주의와 형식」(김형중), 「루카치 은하와 반도의 天空, ‘문학과 사회 상동성론의 성좌들-루카치라는 형식, 고유한 수옹의 고고학1」(황호덕) 등이 실렸다. 황호덕의 글은 루카치의 이론이 서구와 일본, 한국 지성계에 수용되는 과정을 통해 루카치가 우리에게 남긴 지적 유산을 탐구한다. 특히 황호덕은 구중서, 김윤식, 김현, 김우창, 백낙청이 보여준 『소설의 이론』 읽기의 편모들을 모아내면서, “근미래의 ‘형식’에 대한 역사철학적 과제를 대면하게 된다”라고 썼다. 이 대목에서 황호덕의 글은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했던, 어떤 스타일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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