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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 ‘생태학적 상상력’의 발신자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심층인터뷰 ] ‘생태학적 상상력’의 발신자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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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的 감수성 잃은 환경운동은 “지옥길 포장하는 꼴”
잡지활동과 학교강의로 바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에게 질문지를 보내 어렵사리 답변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덕을 감추는 ‘겸손’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끈질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응해줬다. 지면이 좁아 내용의 상당부분을 잘라내 답변 문장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다소 손상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선생님 작업의 줄기를 말씀하신다면.

“지구 생태계는 닫혀진 체계라 농적 순환사회 이외에 지속가능한 삶의 길은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단순히 복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지속가능하고, 현실적으로도 실현가능한 새로운 차원의 농경중심 문화를 창조해나갈 것인가가 현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자비로운 사회가 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생산, 소비수준이 낮은 소박하고 검소한 삶의 방식이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해 동안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는 말을 해왔습니다. 아마 주류문화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지 모르지만, 녹색적 사유는 이런 종류의 상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성립한다고 믿습니다. 주류 환경운동이 이런 점에서, 현실주의라는 미명하에 체제와 타협하고 있다면, 그런 환경운동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한다’는 의미 이외에 큰 의미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낭만적, 은둔자적이라는 평가와 정확한 현실진단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들이 있는데요.

“제가 우리 사회의 대다수 지식인, 학자들의 현실인식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기로 한 것은 오래됩니다. 그런 기대가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아마도 저는 학교에서 뛰쳐나와 ‘녹색평론’과 같은 일을 맨주먹으로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다수 지식인들이 말하는 ‘현실주의’라는 것은 말하자면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거대한 여객선의 갑판에서 의자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따위의 일 이외에,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배의 항로 자체를 바꾸려하지는 않는 ‘현실주의’ 말입니다.”

△요즘 말씀하시는 농민적 평등의식과, 서구자유민주주의 전통 속에서의 평등사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제도가 과연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이냐 하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오늘의 녹색운동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의 환경위기는 인간이 자연을 잘못 다뤄온 문제이기 이전에 문명사회에 오래 누적된 불평등한 인간관계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생태적으로 건전한 사회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공정한 사회가 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의 충족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는 민중이 자신의 삶을 자주적, 자치적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을 보장하기는커녕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위해서 민중적 삶의 자율적 역량을 박탈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이런 정치적 틀을 이용해서 생태적, 사회적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풀뿌리 민중의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는 공간을 민중 자신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확보해내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공동체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공동체는 개인적 가치를 억압하는 측면이 있었고 최근 소공동체 운동을 보면 내부적 폐쇄성으로 인해 공동체 상호간 불신과 반목이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에 서로 반목하고 싸울만한 공동체들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지금은 아직 공동체를 위한 작은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폐쇄적인 측면에 관한 얘기는 흔히 지식인들이 내용도 잘 모르고 하는 얘기인데, 가령 예전에 우리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관행이었던 ‘두레’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질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운용되고 있던 공동체 조직운영 기술이었습니다. 물론 움직임이 별로 없던 전통 농촌공동체가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폐쇄적이었던 점이 분명히 있었던 것은 사실일지라도, 좀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이 과연 ‘자유로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산업사회에서 대다수 민중의 생활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비참합니다. 대체 역사상 인간이 이렇게 잔혹하게 노동에 중독되고, 소비를 강요당하고, 희망도 꿈도 없는 체제의 소모품이 돼 종살이를 강요당한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비록 고된 일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주적으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농민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최근 지식사회에 만연한 근대주의, 농업 및 농촌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몰이해와 무관심을 지적하셨는데요.

“한국의 지식인, 학자들의 가장 큰 병폐는 식민지적 상황에서 살고, 그 상황이 주는 그릇된 이득을 차지하고 살고 있으면서도 이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경제의 세계화라는 것은 이차대전 이후 불어닥친 근대화, 개발론의 열풍에 뒤이어 구호만 달리한 식민주의의 확대판일 뿐인데, 이것을 이론적으로 미화하거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보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은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이것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세계의 핵심적인 재난은 본질적으로 ‘남북문제’라는 서구세계와 비서구 세계 사이의 관계로 집약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 우리가 똑바로 보아야 할 것은 진정으로 문제삼아야 할 것은 비서구세계의 ‘빈곤’이 아니라 서구 및 비서구 엘리트 세계가 향유하고 있는 ‘풍요’라는 사실입니다. 소위 선진국으로의 열망이 팽배한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그러한 선진국 따라잡기가 얼마나 가망없는, 헛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녹색평론’이 계속 이 땅에 자리잡기 위해 편집방향의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녹색평론이 이 사회에서 무슨 크고, 막중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좋은 생각과 능력이 있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소규모로 작업을 진행하는 게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녹색평론이 좀더 개선돼야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려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이념을 배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편집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절한―타협적이지 않은―편집동지들을 발견하는 데 제가 게을러서 미뤄왔지만, 앞으로는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편집 체제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재정문제에 대해서, 독자들에게서 책값 받아서 운영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좀 가르쳐주십시오. 사실 이게 늘 고민입니다. 자본과 시장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내가 하는 책장사도 기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 말입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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