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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
냉전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
  • 교수신문
  • 승인 2016.06.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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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권헌익 지음|박충환·이창호·홍석준 옮김|산지니|358쪽|25,000원

베트남의 유령 관련 문화가 비합리성이나 무지몽매의
표현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 도덕적 가치, 규범, 삶의
물질적 조건 등과 복잡하게 연동돼 사회적 현실의 중요한
축으로 접근한다.

이 책의 필자 권헌익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인류학과 교수로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일련의 저술을 통해 냉전 시대 베트남에서 발생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폭력과 그것이 초래한 대규모 죽음의 비극적인 역사를 인류학자의 치밀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조명해왔다. 이 책은 그에게 인류학의 최고 상 중 하나인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상을 안겨 준 『After the Massacre: Commemoration and Consolation in Ha My and My Lai』 (『학살, 그 이후: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인류학』, 아카이브, 2012)의 후속작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도이머이 정책 이후 베트남 사회에서 뚜렷한 문화현상으로 부각해온 전쟁유령에 관한 베트남인들의 의례적 담론과 실천에 초점을 맞춰, 베트남 전쟁의 비극적 경험 그리고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행위가 갖는 사회적·정치경제적·종교적 함의를 입체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 권헌익 교수

베트남 공산당은 1986년 제6차 전당대회를 통해 시장 지향적 경제개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도이머이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국내적으로 1975년 통일 이후 시행해온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및 국가재분배 체계의 실패와 부작용을 수습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국제적으로는 1978년 중국의 시장 지향적 개혁개방, 1989년 소련의 해체에 이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1990년 독일의 통일 등, 냉전의 한 축을 구성했던 사회주의권에서 발생한 급진적 변화의 물결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도이머이와 함께 상대적으로 짧았던 베트남의 국가 사회주의적 실험이 종언을 고하자 베트남인들의 사회적 삶에도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책의 주제인 베트남 전쟁유령 이야기와 그것을 둘러싼 의례적 실천들은 바로 이러한 거시적인 정치경제적 변혁과 사회변동이라는 맥락에서 부상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문화현상으로서, 좁게는 도이머이 이후의 베트남 사회를, 넓게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탈사회주의 사회 일반이 경험해온 이른바 ‘탈사회주의적 변환(post-socialist transformation)’을 이해하는 데 의미심장한 창을 제공해준다.

기존의 탈사회주의적 변환 연구자들 대부분은 정치조직, 경제관계, 사회구조의 변화에 주로 방점을 둔 거시적 혹은 텍스트 해석 위주의 접근으로 인해 급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탈사회주의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적 욕망과 좌절 그리고 억압과 저항의 문화적 역동성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데 일정정도의 한계를 노정해왔다. 이 책은 치밀하고 장기적인 인류학적 현장조사에 입각해서 수집한 풍부한 질적 자료를 통해 베트남인들의 사회적 삶의 미시적 결들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거시적인 역사적 변화와 정치경제적 맥락 속에서 총체적·학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탈사회주의적 변환 연구에 진일보한 이론적·방법론적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령의 삶’ 혹은 ‘유령의 생명력’이라는 표현은 전형적인 형용모순이다. 하지만 당대 베트남인들에게 이 형용모순은 허튼 말장난이나 그럴듯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엄연한 사회적 현실의 재현이다. 이 책에 따르면 최근 베트남에서 관찰되는 전쟁유령 현상은 도이머이 이후 급변하는 물질적·상징적 질서 하에서 발생하는 ‘집단적 망상’ 혹은 ‘문화적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베트남인들에게 일종의 자연적 현상으로 인지되는 존재론적 힘을 가진다. 따라서 이 책의 주인공인 베트남 전쟁의 유령은 자크 데리다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등장하는 역사적 은유로서의 유령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형태와 종교적 상상력의 형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성되고 살아 숨 쉬는 매우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베트남의 전쟁유령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실체로서, 비록 과거에 속하지만 유비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식으로 현재에도 지속된다고 믿어지는 존재”로서 일종의 ‘사회적 사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령 이야기나 귀신 이야기만큼 중대하면서도 진지한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주제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유령이나 귀신은 인류의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는 사회적 사실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학계의 이러한 지적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베트남에서는 유령과 유령을 둘러싼 문화적 담론과 실천이 매우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성찰과 자아정체성 표현의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인류학적·사회학적·역사학적, 심지어 정치경제학적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베트남의 유령 관련 문화가 비합리성이나 무지몽매의 표현이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경험, 도덕적 가치, 규범, 삶의 물질적 조건 등과 복잡하게 연동되어 사회적 현실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것으로 접근한다.

이 책은, 비록 베트남 사회에서 유령이 조상신이나 여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영적 존재에 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주변적인 위치를 점하고는 있지만 베트남인들의 사회적 삶에 구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관념과 실천이 보다 광범위한 도덕적·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 데 의미심장한 창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한 민족지적 기술을 통해 감동적으로 논증해내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인류학적 논증은 조상신에게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유령을 사회구조의 영역과 사회적 상상력의 영성으로부터 배제해온 에밀 뒤르켐의 종교사회학적 전통을 설득력 있게 논박 및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이론적 의의를 가진다. 저자는 “사회이론 내에서 유령의 부재는 기능적 가치와 구조적 질서에 대한 이론적 선입견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뒤르켐의 종교사회학과 성스러운 것에 관한 개념화에 반론을 제기한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중심성의 상징적 구성이라는 뒤르켐의 개념적 도식이 사회적으로 주변적인 실체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상관적 프레임 속에서 재고돼야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이론적 프레임 하에서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베트남인들의 친족관념과 친족의례체계는 계보적 관계와 혈통적 위계에 주로 방점을 두는 기존의 친족이론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반론을 제기한다. 즉 그는 전쟁유령 현상을 통해 구체화되는 베트남인들의 친족관계 및 친족의례체계가 우리와 그들 그리고 안과 밖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계보적·규범적·정치적 이방인을 이중동심원적 구조 내에서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매우 생성적이고 창조적이며 개방적인 체계임을 보여준다. 베트남 친족과 친족의례체계의 이러한 이중동심원적 구조는 베트남 전쟁의 지극히 혼란스럽고 교란된 전선으로 인해 이탈된 상태에서 ‘객사’한 수많은 영혼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원혼을 달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를 통해 도이머이 이후 베트남 사회는 냉전의 양극적 질서가 초래한 역사적 갈등과 비극을 넘어 보다 성숙하고 조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결론에서 권헌익 교수는 베트남인들이 전쟁유령을 위해 수행하는 포용적이고 치유적인 의례행위가 “역사의 상처와 고통을 넘어 인류의 연대라는 윤리적 지평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문화적 실천”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냉전의 오래된 질서가 여전히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삶을 양극적 대치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사회다. 베트남 전쟁유령 현상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화해와 연대의 가능성은 아직도 냉전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사회에 강력한 윤리적·실천적 교훈을 남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또한 한국 사회가 현대사의 질곡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 그리고 최근 세월호 참사로 인해 꽃다운 나이에 쓰러져간 304명의 희생자들을 적절하게 기억하고 기념해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웅변하고 있기도 하다.

 

박충환 경북대·고고인류학과 
필자는 캘리포니아대(산타바바라)에서 중국 현대문화 전공으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술로는 『글로벌 시대의 문화인류학』(공역), 『석기시대 경제학』(역서), 「Nongjiale Tourism and Contested Space in Rural China」(논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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