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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때마다 ‘쇄신’ … 타 학문 넘나들며 ‘인간과학’ 수준까지
위기때마다 ‘쇄신’ … 타 학문 넘나들며 ‘인간과학’ 수준까지
  • 이용재 전북대·사학과
  • 승인 2016.06.0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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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20세기 프랑스 역사가들: 새로운 역사학의 탄생』 필립 데일리더, 필립 월런 엮음|김응종 등 옮김|한국프랑스사학회 감수|삼천리|1,104쪽|58,000원

프랑스 역사학은 일찍부터 ‘융복합’ 학문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몰락은 물론 아날학파 역사학의 위기가 언급될 때에도, 과거‘역사’에서
현재 ‘기억’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역사학을 쇄신하는 데 계속 앞장서 나갔다.

20세기가 역사학의 세기였다면, 전성기 서양 역사학의 한복판에는 프랑스 역사가들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19세기 말 제3공화국이 성립한 후, 역사학은 대외적으로 국력을 신장하고 대내적으로 공민의식을 함양하고자 하는 공화주의 공교육 체계의 일환으로 널리 발전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은 철학이나 문학의 글쓰기와는 구별되는 소양과 방법론을 갖춘 학문 분야로 발돋움했으며,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 역사가들이 대학과 교육기관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 프랑스 역사가들은 우선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서 이른바 ‘과학적’ 역사학의 문을 연 독일의 랑케 사학으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사학을 발전적으로 극복해나가고자 했다. 비판적 사료분석과 객관적 서술양식을 도입해 역사학의 과학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인물과 사건 중심의 연대기, 정치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구조와 상황으로의 시야를 확대하고 사회와 경제 중심의 역사서술로 한걸음씩 옮겨가기 시작했다. 요컨대 민족서사시적인 전통적 역사학을 뒤로하고 개념과 방법론을 중시하는 사회과학적인 역사학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폐허 위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담아 발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한편으로 유물론적 역사 해석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창의력보다 사회구조와 계급구성에서 변혁의 원동력을 찾는 ‘이데올로기적인’ 동시에 ‘과학적인’ 역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딛고 성장한 아날학파 역사학은 역사의 시간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통해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고 세계 역사학을 선도하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장기지속’, ‘국면변동’, ‘망탈리테(심성구조)’ 등 아날학파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개념들은 이제 역사가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역사용어가 됐다.

하지만 20세기 프랑스 역사학의 계보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날학파라는 두 줄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20세기 식민제국의 성장과 와해를 눈앞에 지켜본 역사가들은 중동과 마그레브 지방의 역사문화, 더 나아가 적도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문명을 탐색하면서 제3세계 역사인류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가 하면 역사가들은 지역풍물과 지리환경에 대한 고찰을 통해 지역문화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프랑스 특유의 인문지리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프랑스 역사학은 일찍부터 경제통계학이나 인류학, 지리학 등 인접 사회과학과 서슴없이 뒤섞이면서 역사학을 사회 전반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융복합’ 학문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소비에트세계의 붕괴에 뒤이어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이한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몰락은 물론 아날학파 역사학의 위기가 언급될 때에도, 프랑스 역사가들은 한편으로 과거‘역사’에서 현재 ‘기억’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에서 ‘문화’와 ‘담론’으로 시야를 확대하면서 역사학을 쇄신하는 데 계속 앞장서 나갔다.

이 책은 20세기 현대 역사학을 풍미한 프랑스 역사가들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것이다. 지난 세기 역사학의 풍요를 일군 프랑스 역사가 42명의 학문적 삶에 대해서 영미권 현역 역사가들이 회고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평가의 붓을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 블로크, 미셸 푸코, 로제 샤르티에 등등 이미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이름들, 앙리 세, 가스통 루프넬, 자크 베르크 등등 다소 낯선 이름들, 하지만 프랑스 역사학을 이끌었던 불후의 이름들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이 책에 이름을 올린 프랑스 역사가들 중 최고 年長者인 앙리 피렌과 가장 젊은 앙리 루소 사이에는 거의 한 세기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역사가 42명은 모두 20세기에 자신의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서 역사가들이 자신이 몸소 살았던 시대를 과연 어떻게 바라봤는가를, 더 나아가 역사가들이 본 20세기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역사가 E. H. 카는 “역사를 알려면 먼저 역사가를 알아야 하고, 역사가를 알려면 우선 그가 살았던 사회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역사-역사가-현재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와 탐색은 이 책의 전제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가에 대한 소개와 논평이 사상과 학문의 성숙을 삶의 궤적을 통해 추적하는 한 편의 짤막한 평전처럼 구성돼 있다. 요컨대 역사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의 학문과 저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부응해나갔는가를 탐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의 집단 초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랑스 역사학의 ‘다양함’과 ‘새로움’이다. 현대 역사학을 이끈 프랑스 역사가들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일찍부터 역사학을 인간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종합적 ‘인간과학’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대개의 프랑스 역사책에는 인문지리학, 인구통계학, 문화인류학 심지어 계량경제학 등등에 대한 풍성한 정보들로 가득하다. 나아가 프랑스 역사가들은 격동의 20세기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학의 위기가 운위될 때마다 적극적으로 영역과 방법론을 쇄신하는 데 앞장섰다. 어제의 아날 학파가 오늘의 아날 학파와 사뭇 다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경제사에서 문화사로, 과거역사에서 현재기억으로, 계급구조에서 일상담론으로 관심과 초점이 이동한다. 언어로의 전환에서 전지구적 전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환(turn)’이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역사학의 최근동향 속에서도 어김없이 프랑스 역사가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 역사학은 늘 ‘새로운’ 역사학인 것이다.
이러한 20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의 도전과 성취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인접학문과의 이렇다할만한 연계도 교류도 없이 독불장군식으로 발전해온 한국 역사학계의 현황과 무척 대조적이다. 실증사학 또는 민족사학의 외길을 고집해온 한국역사학은 관계사나 비교사의 전망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지평에서 한국사를 조망하는 폭넓은 시야의 확보에도 매우 인색한 듯하다. 서양역사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역사학 개념도구와 방법론들을 한국사 연구에서는 여전히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융복합적 시야의 확대와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수용 등등, 이 책이 한국역사학의 발전을 위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은 한국프랑스사학회에서 기획한 것이다. 프랑스역사를 전공하는 국내 역사가들이 직접 번역에 참여했다. 편하게 읽히기 힘든 방대한 분량을 굳이 번역한 것은 한편으로 21세기 역사학의 앞날을 가늠하기 위해서 지난날의 성과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역사학의 특장과 성취가 국내 역사학계에서 제대로 이해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은 자신이 한때 사사했거나 사숙한 역사가들, 직간접적으로 친분과 교류를 나눈 역사가들, 연구주제와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는 역사가들을 우선 맡아 우리말로 옮겼다. 따라서 이 번역서는 한국 연구자들이 프랑스 역사가들과 맺은 학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동시에, 한국 연구자들과 프랑스 역사가들 사이의 학문적 교류의 일환이기도 하다.
역사란 과거의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기가 사는 시대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현재를 사는 역사가의 시대의식이 과거를 보는 시야를 쇄신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학을 만들어가는 생생한 사례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용재 전북대·사학과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함께 쓰는 역사』(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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