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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나의 부전공, 기록학
[學而思]나의 부전공, 기록학
  • 박찬승 충남대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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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1:20:27
박찬승/충남대 한국현대사

얼마 전 우리 대학에서는 기록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대학아카이브즈,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교정에 걸린 행사 플래카드를 보면서 과연 ‘아카이브즈’라는 말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수는 30명이 채 안됐다.

사실 필자도 아카이브즈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은 1994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 있으면서였다.

그 전에도 정부기록보존소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아카이브즈가 무엇인지는 미국 워싱턴시와 그 인근에 있는 내셔널 아카이브즈 본관과 분관에 가서 비로소 알게 됐다. 그곳에서 처음 아키비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접했고, 미군정 관계 파일들이 박스에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를 보게 됐다. 또 80석 정도 되는 좌석이 다 차서 순번을 기다리고 서 있을 정도로 아카이브즈가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을 알게 됐다. 하바드대학의 대학아카이브즈에 가서는 대학아카이브즈라는 것이 있는지를 처음 알았다. 보스턴의 케네디대통령기록관도 대통령기록관이라는 곳을 처음 접한 나로서는 경이로운 곳이었다.

당시 마이크로필름 리더기 한 대로 버티고 있던 정부기록보존소, 10년에 한 번씩 문을 열던 대학사 편찬실, 퇴임하는 대통령이 정부기록보존소에 보낸 문서라고는 ‘이관할 문서 전혀 없음’이라고 쓴 문서밖에 없다는 우스개 소리를 듣고 씁쓰레하던 일 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역사연구자도 사료를 읽고 해석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료의 수집과 보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귀국 후 기록보존소를 제대로 만들자는 학술회의를 열었는데 반응이 의외로 뜨거웠고, 관심을 갖는 이들도 늘어났다.
리고 지난 2000년 비교적 내용이 충실하게 갖춰진 ‘공공기관의 기록관리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다. 적어도 공공기관의 기록물은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일은 사람이 한다. 매일 생산되는 수많은 기록 가운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여 남겨두고, 또 관심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목록을 만드는 것은 아키비스트의 능력에 달려 있다. 도서관에 사서가 있고, 박물관에 학예사가 있듯이 기록관에는 아키비스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키비스트의 양성은 시급한 일이 됐다.

이런 생각들이 확산되면서 몇몇 대학이 대학원에 협동과정으로 기록학 또는 기록관리학 전공을 개설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도 대학원에 기록학 전공 협동과정을 개설했다. 그런데 국내에는 기록학을 제대로 전공한 이가 거의 없어, 결국 사학과와 문헌정보학과 교수들, 그리고 정부기록보존소의 학예사들이 강의를 맡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강의를 맡는 교수들은 불가피하게 부전공으로 기록학을 공부하게 됐다. 가르친다기보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다루는 기록이 나라마다 워낙 다르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학위를 따오라고 권유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 기록학이다.

매학기 학생들과 함께 외국의 기록학 서적을 같이 읽고, 한자 초서와 일본어 등이 섞인 자료를 읽으면서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전망이 그리 썩 밝은 것도 아니다. 법률은 만들어졌지만 학생들이 일해야 할 기록보존소와 자료관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국회에 이미 기록보존소가 만들어졌고, 최근 대전시와 경기도 등에서 기록보존소를 만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몇몇 대학들에서 기존의 대학자료실을 확대 개편해 대학기록관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미미한 움직임에 불과하다. 나는 오늘도 자치단체, 대학, 기업, 교회, 사회단체에서 기록관 설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건축가들이 건축기록관을, 영화인들이 영상기록관을 만드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학수고대해본다. 그래야 나의 부전공도 보람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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