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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년 전의 책을 지금에서야 번역한 이유
1백년 전의 책을 지금에서야 번역한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6.05.3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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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법학

이 글은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들녘, 2016.5)를 번역한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옮긴이 해제’에 쓴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 박홍규 영남대 교수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너무나 사랑한 나는 이 책이 제발 우리말로 번역돼 우리나라에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와 전쟁 및 사형 반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비폭력운동이 지금보다 더욱더 적극적으로 전개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1세기가 더 지난 지금까지도 번역은 이뤄지지 않았고, 나는 결국 영어 등 다양한 번역으로 여러 해 동안 읽고 이해한 내용을 직접 옮기게 됐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고자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최근 권력에 대한 회의가 너무도 커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권력을 회의했지만, 최근 21세기에 와서 더욱더 회의하게 됐고, 이에 따라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명저인 톨스토이의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책은 내가 아는 어떤 책보다도 反권력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에게 권력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강력하다고 생각해 그것에 가장 극단적으로 대처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에 관심을 둔 것인데, 내가 사는 이 나라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 권력주의가 강한 곳이어서 아나키즘은 실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아나키즘을 제대로 살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갖가지 권력 아래 노예처럼 살아간다. 그 권력은 아버지이고 형이고, 선생이고 상관이고, 사장이고 과장이고, 대통령이고 시장이다. 그것은 모두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지배자다. 그 아래 피지배자는 권력관계를 없애 평등한 관계를 만들고자 하지 않고, 자신이 언젠가 지배자가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자기에게 권력이 돌아오면 더욱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이 책은 그런 점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특히 우리에게 필요한 고전 중의 고전이다. 1906년 톨스토이가 처음 이 당에 소개됐을 때,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이 소개됐더라면 권력의 노예라는 멍에에서 좀더 빨리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그 뒤 지금까지 톨스토이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외국인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물론 문학조차도 제대로 이해되거나 수용되지 못했다. 가령 그 누구보다도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이광수는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로 톨스토이의 어느 작품보다도 『부활』과 함께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애독한다고 말했지만 이 책으로 러시아 정부나 교단에서 추방된 톨스토이나, 이 책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에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여 여러 차례 감옥을 갔던 간디와 달리 일제를 조선의 해방자라고 믿고서 그것에 철저히 아부해 민족을 배반했다.

왜 똑 같은 식민지 상황이었던 인도와 한반도에서는 전혀 반대의 톨스토이가 존재했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게다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소설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활』의 영향도 이광수에게는 그가 쓴 「무정」, 「재생」, 「유정」등의 소설에서 드러나듯이 봉건적인 여성의 순결 도그마를 강조하는 것으로 왜곡된 신파극이었을 뿐이었다. 즉 『부활』이 보여주는 재판이나 감옥, 국가나 정부, 관료나 토지사유 등의 당시 러시아 사회에 대한 비판은 이광수의 경우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광수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였던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유명세를 위해 팔아먹은 것에 불과했고, 그런 잘못된 신파적인 톨스토이 소개로 인해 일제강점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문학이나 사상을 비롯한 정신 풍토에 엄청난 왜곡을 초래했다. 오늘날 우리의 국가지상주의, 권력지상주의, 독재지상주의, 자본지상주의 등의 풍조도 그런 왜곡이 빚은 하나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아나키즘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폭력주의적 테러리즘의 일종인 아나키즘이다. 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권력주의 비판을 본질로 하는 아나키즘의 정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새롭게 평가하는 이유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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