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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 달구는 다양한 미디어 출현 … “인터넷 공간 건전하게 성장해야”
공론장 달구는 다양한 미디어 출현 … “인터넷 공간 건전하게 성장해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5.25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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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11강.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여론과 공중-대중매체의 책임’

지난 14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시즌3 윤리 강연은 3섹션 ‘정치 공간과 구성’의 두 번째 강연으로,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여론과 공론-대중매체의 책임’ 편이었다. 여론을 바탕으로 합리적 공론이 창출돼야 민주주의가 심화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강연이다.
김민환 명예교수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전남대 교수를 거쳐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해왔다. 지은 책에는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동아시아의 근대신문 지체요인』, 『한국언론사』, 『민족일보 연구』, 『민주주의와 언론』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 등이 있다.
이날 강연에서 김 명예교수는 “현대사회에서는 언론미디어가 잘 발달해 여론을 높은 수준의 공론으로 정제하는 것이 용이해졌다고 믿는 사람도 많으나 이런 믿음은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이 엄존하는 한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논의를 풀어나갔다. 그가 말하는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이란 한국의 여론형성 메커니즘의 특수성, 미디어 이용패턴의 변화와 공론장의 구조적 분할을 말한다. 그는 조선 유학자 율곡 이이의 말을 빌려 “여론은 본질적으로 여항의 것”으로 “여론은 공론장에서 숙의를 거쳐 공론으로 발전해야 하고, 그 공론이 국시가 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부분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여론과 공론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여항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만약 위아래 어디에도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公論在於朝廷卽其國治 公論在於閭巷卽其國亂 若上下無公論卽其國亡).”
조선 중기 유학자 율곡 이이의 말에는 여론을 중시한 공론정치의 기본 이념이 오롯이 담겨있다. 율곡의 주장은 여론을 중시해야 한다는 하나의 당위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말에는 공론정치에 대한 낙관론이 배어있다. 여론이라는 개념과 공론이라는 개념을 현대사회에 대입해 우리는 율곡의 말을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다. “정부에서 여론을 수렴해 공론으로 삼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여론을 방치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여론을 두려워 해 입을 막고 죄로 다스리면 나라가 망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뭇사람의 여론을 토론이나 숙의과정을 거쳐 공론으로 발전시키고, 그 공론을 존중해 정치를 펴면 민주주의가 잘 구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언론미디어가 잘 발달해 여론을 높은 수준의 공론으로 정제하는 것이 용이해졌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이 엄존하는 한 공허할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불편한 진실
우리나라에서는 여론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공론을 창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여론형성 메커니즘의 특수성을 살펴보면 그 답이 나온다. 여론은 궁극적으로는 민의를 대변할 대표를 뽑는 선거를 통해 반영된다. 투표는 여론을 표출하는 핵심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투표행태에 관한 분석이야말로 여론형성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이갑윤은 한국의 투표행태에 관해 분석한 『한국인의 투표행태』(2011)에서 유익한 분석결과를 제시했다. 서구에서 투표참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구사회학적 변수는 연령을 비롯해, 소득수준, 교육수준, 직업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계층변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연령을 제외한 사회경제적 계층변수가 투표 참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매우 제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의 선거에서 투표 참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지역이라는 변수다. 또 다른 변수는 당파적 태도와 정치적 이념성향이다.

신문저널리즘이 위축되고, 공론장이 연령에 따라 분열된 것도 공론창출을 가로막는다. 여론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공론을 창출하는 데 가장 강점을 지닌 미디어가 신문인데도, 상대적으로 이용도나 신뢰도가 낮다는 사실은 공론창출 메커니즘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일반적으로 연령이 높을수록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비율이 높고, 연령이 낮을수록 진보적인 정당에 투표하는 비율이 높다. 연령대에 따라 선호하는 미디어가 다르다는 것은 연령에 따라 공론장이 분화할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 통합적인 사회적 공론을 창출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의미 있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4·13 총선에서 지역주의가 부분적으로 허물어지고, 연령별로도 50대가 이전과는 다른 투표행태를 보였다. 또한 한국언론진흥재단(이하 언론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20~30대 연령층에서 인터넷 이용시간이 줄고,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하는 결합 열독률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이런 균열은 비록 완만하고 점진적이어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여론형성 과정을 왜곡하는 강고한 틀이 다소나마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디어생태계 현황과 공론창출 미디어
근자의 미디어생태계에서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미디어가 수적으로, 종별로, 그리고 질적으로 매우 다양해졌다는 사실이다. 수나 양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다양성을 갖춰 이념적으로 좌우 또는 중도를 지향하는 미디어들이 공론장을 달구고 있다. 미디어가 다양할수록 다원적 체제에서 다양한 여론이 생성될 수 있다. 둘째는 인터넷을 매개로 한 뉴스 유통이 급증할 뿐만 아니라, 수용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사회연결망을 형성, 의견이나 정서를 공유함으로써 공론형성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중앙일보 그룹이 이른바 조중동 프레임에서 벗어나 중도 지향성을 보이면서 공론장에 의미 있는 변화를 촉발하고 있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공론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현행 미디어생태계에서 몇 가지 조건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언론의 자유가 더 정착하고 방송영역에서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 우리나라 수용자들은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얻는다. 뉴스 이용의 점유율이 높은 KBS와 MBC는 현재 공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지배구조를 보면 두 방송이 독립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직간접적인 간섭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는 정부모델(the government model), 의회모델(the parliamentary model), 전문모델(the professional model) 및 시민모델(the citizen model)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제도는 정부모델과 의회모델의 절충형태로 볼 수 있다. 방송의 독립성과 공영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전문모델이나 시민모델방식을 보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저널리즘이 정파성을 극복해 다양성을 지향해야 한다. 수용자가 바라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는 공급원으로부터 뉴스를 얻는 것이다. 우리나라 저널리즘에는 정치적 입장이 깊게 배어있다. 윤영철은 오래 전에 이를 정치적 병행성(political parallelism)이라고 규정했다. 정치보도만 그런 것일까. 최근에 이준웅은 우리 언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경향성(tendentiousness)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경향성이란 기사를 통해 이용자의 이해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 미디어는 정치보도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보도에 이르기까지 고질로 굳어진 경향성을 이제 접어야 한다. 여론이라는 것은 논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해관계의 문제일 때가 더 많기 때문에, 여론이 공론으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타협이나 조정이 필요하다.

셋째로 공론창출 과정에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인터넷 공간이 건전하게 성장해야 한다. 인터넷 공론장은 급속하게 주변 공론장에서 중심 공론장으로 그 위상을 바꿔가고 있다. 윤석민은 신문이 극심한 경영 위기 속에 수구적 보수와 파괴적 진보로 양극화돼 싸우고 있고, 방송도 사사건건 불공정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인터넷이 끊임없는 시비 거리를 양산함으로써 공론장이 난장 상태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김은미와 이준웅이 주장했듯이, 인터넷을 통한 공적·정치적 사안에 대한 토론이 증가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참여 양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공론장의 확장이 현 단계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비판은 인터넷 미디어의 무한한 진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론에서 민주적 이상의 실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특히 강조하는 두 가지가 담론의 질과 참여의 양이다. 인터넷이 참여의 양을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담론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수용자가 인터넷 공간에서 활발한 토론을 통해 공적 어젠다에 관한 의견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숙의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공론장을 숙의민주주의의 장으로 발전시키려면 공론장이 자동조절의 장이 되게 해야 한다. 정치권력이 그것도 당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론장을 훼손하는 일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누가 좋은 공론을 만드는가?
결론적으로 공론 창출은 여항의 대중과 미디어, 그리고 정부 또는 권력의 협업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전 과정을 지켜보며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주도하고 아울러 감시하는 최종적 책무는 미디어나 권력이 아니라 대중에게 있다. 대중이야말로 공론장의 주체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미디어는 어디까지나 공론창출 과정의 매개체일 따름이며, 정부는 공론의 수용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준웅이 지적한 바 있지만,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게시판, 댓글 공간,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 등 새로운 토론의 장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비판적 담론공중이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을 매개로 정치적 읽기와 쓰기의 능력을 단련하고, 정치적 효능을 경험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각성돼 있고, 비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판적 담론공중이 스스로 공정한 담론의 규범을 내면화해 단순한 미디어 수용자가 아닌 미디어 이용자로 거듭나, 공론장의 당당하고도 합리적인 주체로 우뚝 설 때,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숙의민주주의가 활짝 개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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