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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위계질서로 세력 확장한 막강한 종 ‘사피엔스’
상상의 위계질서로 세력 확장한 막강한 종 ‘사피엔스’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6.05.2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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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143. 유발 하라리 교수의 『사피엔스』
▲ 멸종한 대형 ‘디프로토돈’.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도발적인 저작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김영사, 2015)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저자인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지난 11일 한국 강연을 마쳤다. 또한 그는 『총·균·쇠』의 저자인 UCLA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와 대담을 통해 미래의 인류상 변화를 예상했다. 기술은 무기물 형태의 생명체를 낳고, 인종 간 혹은 인간과 로봇 간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게 요지다. 200년 후 인간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하라리 교수는 생각한다.

▲ 호모 사피엔스는 기민했고, 다른 인간 종들을 멸종시키면서 진화했다. 사진은 유발 하라리 교수의 『사피엔스』 책 표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라리 교수를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저자로 만들었을까. 책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의 총 4부와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부터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까지 20개 장으로 이뤄졌다. 하라리 교수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불멸을 꿈꾸는 사피엔스는 언젠가 죽음을 극복할 것이고, 이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인간은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물공학으로 지적설계자의 위치에 오르려 한다. 그러면 사피엔스는 언젠가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기술의 수준은 인간 유전체 지도를 처음 만드는 데 15년과 30억 달러가 필요했지만, 이젠 몇 백 달러만으로 한 사람의 DNA 지도를 만들 수 있게 상승했다.

저자는 역발상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예컨대 고대 수렵채집인들을 현재의 우리보다 지능이 낮고 유약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 수준에서 보면 그들이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알아차리고, 신체의 기민성도 매우 뛰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증거들을 토대로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이다. 물론 전체 정보의 양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피엔스로 인식하는 인간 종의 평균 뇌 용적은 점차 줄어들었다고 한다. 뇌 용량의 차이는 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정보의 크기가 달라짐을 의미한다. 심지어 수렵채집인들은 우리보다 노동을 덜 했다. 현대인들이 대개 1일 8시간 이상 일을 하는 반면, 수렵채집인들은 3∼6시간 미만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사피엔스는 농업사회를 거치면서 정착했다. 그 결과, 인류의 노동 시간은 매우 길어졌다. 땅을 일일이 개간하고, 잡초를 뽑아내야 하는 등 할 일이 방대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다. 전염병의 원인은 정착생활의 기반이 된 가축에서 유래한 게 대부분이다.

기민하고 머리 좋았던 수렵채집인
하라리 교수가 지칭하는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 종의 일원들을 포괄한다. 인류는 사피엔스 상위 개념으로, 호모 屬에 속하는 모든 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다른 인간 종과 잘 지냈을까. 여기서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첫째는 교배이론이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의 땅에 퍼져나가면서 교배하고 하나의 집단이 됐다는 가설이다. 둘째는 교체이론이다. 일종의 인종학살이다. 저자는 후자에 무게를 둔다. 사피엔스가 보기에 네인데르탈인은 매우 친숙하지만 관용하기엔 많은 부분 달랐다. 따라서 전멸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 연구에선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의 교배 증거가 나오고 있지만, 지극히 일부이며 충분히 수정 가능하다는 것이 하라리 교수의 설명이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사피엔스가 최강자가 됐을까. 그는 사피엔스가 의사소통을 하고 지식을 집적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의 산물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 다만 그 결과는 파장이 넓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 사피엔스는 분명 머리가 좋았다. 이른바 현대에서 논의되는 ‘뒷담화이론’은 사피엔스를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끌고 간다. 뒷담화이론은 직장 상사를 욕할 때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큰 맹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도 필요한 언어이자 정보다. 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약 150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어떻게 더 큰 규모로 성장해 제국을 건설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바로 신화와 같은 허구의 등장에 있다. 하라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시인류의 행동 패턴이 수십만 년간 고정돼 있던 데 비해 사피엔스는 불과 10년 내지 20년 만에도 사회구조, 인간관계의 속성, 경제활동을 비롯한 수많은 행태들을 바꿀 수 있었다.” 지금도 사회 체제는 재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들의 종교와 사회정치적 체계에 대한 정보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 점은 분명 인정해야 한다.

기원전 9500∼8500년 경 인류는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이행한다. 하라리 교수는 역사상 최대의 사기가 이 시기에 일어났다고 적었다. 우선 농업으로 바뀌면서 사피엔스는 없던 병이 생겼다.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온갖 병치레를 겪은 것이다. 특히 밀을 재배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쏟고 영원히 정착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저자는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라며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고 밝혔다. 농부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돌아온 것은 더 열악한 식사뿐이다. 그 대가는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의 탄생이었다. 이건 분명 사기다. 얼핏 보면 농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사원을 건설해 통치를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라리 교수는 다시 거꾸로 설명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를 발견한다. 그들은 10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을 보고 놀란다. 이 유적지와 구조물들은 농경사회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실용적 목적도 없이 사원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스터리다. 결국 정착 농업사회가 세워지고 종교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사원이 세워진 게 아니라, 사원을 위해 정착 생활을 했는지 모른다는 가설이 세워진다.

무지의 발견으로 촉발된 과학혁명
종교로 무장한 제국은 과학혁명을 낳는다. 근대 과학은 유럽 제국이 팽창해가면서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주장이 독창적인 것은 과학혁명을 무지의 혁명이라고 지적한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이전의 지도들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 세상을 다 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런데 15∼16세기 유럽인들은 지도에 빈 공간을 남겨두기 시작한다. 즉, 모르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됨으로써 과학적 사고 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라리 교수는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고 적었다.
과학, 산업, 군사기술은 이제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된다. 자본주의야말로 상상의 위계질서이고, 전 지구적 제국을 통합하는 종교로 작용한다. 상호주관적 신뢰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로 연결된다. 저자는 자본과 부를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이고, 부는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되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재투자된다. 한편, 산업혁명은 증기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그런데 사피엔스가 결집하며 생태계에 몰고 온 재앙은 무지막지하다. 사피엔스가 호주에 상륙한 후, 몸무게 50킬로그램이 넘는 동물 24종 중 23종이 멸종했다. 대형 디프로토돈의 멸종은 기후변화 때문이 아니라 사피엔스 때문이다. 북미에선 대형동물 47속 중 34속이 지구상에서 없어졌다. 남미에선 60속 중 50속이 사라졌다. 3천만년을 버텨온 검치고양이가 사라졌다. 사피엔스는 지구 대형동물의 절반가량을 멸종으로 몰았다. 이를 하라리 교수는 멸종의 제1의 물결이라고 지칭했다. 농업혁명에 따라, 멸종의 제2의 물결, 산업활동에 따른 멸종의 제3의 물결이 곧 들이닥친다. 특히 현대의 가축농장은 동물의 심리적 속성을 배제하고 생명을 기계로 간주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사피엔스는 별것 아닌 존재지만 진보를 위해 다른 종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한 빅 프로젝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분명한 건 『사피엔스』가 오랜만에 읽는 재미를 안겨줬다는 점이다.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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