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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먹고 마라톤 토론
참석자 사로잡은 지적 긴장감 팽팽
도시락 먹고 마라톤 토론
참석자 사로잡은 지적 긴장감 팽팽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5.24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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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정책연구원 제8회 아산서평모임 참관기
▲ 지난 18일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아산서평모임에서 김명섭 교수(왼쪽 첫 번째)의 발제에 이어 박명림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가 준비한 토론문을 읽고 있다. 사진=아산정책연구원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이 ‘아산서평모임’ 첫 회를 진행한 것은 작년 3월의 일이다. 건축가인 서현 한양대 교수의 책 『빨간 도시: 건축으로 목격한 대한민국』(효형출판, 2014)이 막 기지개를 켠 아산서평모임 무대에 초청된 첫 책이었다. 그리고 지난 18일, 여덟 번째 책이 이 서평모임에 초대받았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의 대작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서강대출판부, 2015, 825쪽, 36,000원)이었다.

아산서평모임에 관한 짧은 기사(<교수신문> 823호, 8면 참조. 2016.3.21)를 썼던 기자는 궁금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 많은 전공자들이 모여 문제의 책에 접근해갈까. 알려진 공식적인 서평모임 시간은 저녁 7시부터 10시, 세 시간이다. 이를 위해 아산정책연구원은 도시락을 준비해서 참가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과연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발표자 한 사람, 토론자 두 사람으로 세 시간을 꽉 채우는 걸까. 이들 역시 긴장을 어느 정도 유지하다가 결국 풀어지는 이완된 형식의 집담회로 막을 내리는 건 아닐까.

기자가 서평모임이 열리는 아산정책연구원 2층 회의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10분이었다. 준비한 도시락으로 저녁을 마친 참석자들로 이미 회의실은 뜨거워져 있었다. 타원형 라운드 테이블 위에 참석자들의 명패가 세워져 있었고, 긴 시간 토론이 이어지는 걸 대비해 작은 생수 한 병씩이 놓여 있었다. 각자의 명패 앞에 참석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역사학), 김동하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정치학),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사상), 김형철 연세대 교수(철학), 신복룡 건국대 명예교수(정치학),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학), 윤정란 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종교학),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국제법), 이기범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국제법), 이기성 숭실대 교수(교육학), 이동철 용인대 교수(중국철학),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사회학), 장미란 한국 YWCA 연합회 실행위원, 장인성 서울대 교수(동양정치사상), 정원섭 서울대 철학문화연구소 교수(윤리학),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중국철학), 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한국현대사)의 얼굴이 비쳤다.
물론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과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한국학연구센터 센터장, 진행을 맡은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와 주인공인 김명섭 교수, 그리고 토론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정치사)도 함께 자리했다. 기자를 포함해 모두 24명이 ‘서평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참석자들의 전공 면면이 정치, 종교, 철학, 윤리, 국제법, 법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하단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제8회 아산서평모임의 주인공인 김명섭 교수의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한국전쟁’에 관한 저술이다. 김 교수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함께 한국전쟁 연구 분야의 ‘트로이카’로 불리는 젊은 학자다. 그러니까 이번 서평모임은 한국전쟁 연구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보이고 있는 학자들 셋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였던 셈이다. 사회자의 소개에 이어 7시 20분, 저자인 김명섭 교수가 준비해온 발제문과 PPT 시연을 맞물려서 요지 발표에 나섰다. 그의 발제는 7시 55분까지 이어졌다. 이어 박명림 교수와 이완범 교수가 번갈아 토론에 나섰다. 이들은 ‘6.25전쟁’이란 용어의 타당성 여부, 정전협정과 정전체제의 개념과 성격, 평화협정 전환 등을 놓고 서로 창과 방패가 되기도 했다. 토론이 마무리돼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은 건 10시 5분.

사회자인 정수복 박사는 참석한 타 전공자들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이근관 교수, 이기범 연구위원, 이동철 교수, 김기봉 교수, 조성훈 부장, 신복룡 명예교수, 윤정란 연구원, 정원섭 교수 등이 토론을 거들었다. 특히 이근관 교수와 이기범 연구위원은 ‘국제법’을 배경으로 발제자와 토론자의 빈틈을 메워나가려는 모습을 보여 인상적이었다. 이들의 발언을 듣고 두 토론자가 다시 의견을 마무리했다. 발제자인 김명섭 교수에게 최종 정리 기회가 주어진 것은 밤 10시 51분. 김 교수는 정확히 16분 동안 자신의 책에 관해 쏟아진 여러 지적과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사회자가 서평모임 종료를 알렸을 때 시계는 1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4시간이 넘는 마라톤 서평은 그렇게 이어졌다.

인상적인 대목은 두 가지였다. 우리 학계의 한국전쟁 연구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는 연구자들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발제자인 김명섭 교수는 서양사에 대한 박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이 낳은 정전체제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역사정치학’적 관점에서 제시했는데, 박명림 교수 역시 이런 김 교수의 노작을 포함해 한국전쟁 연구가 미국이나 일본, 중국의 그 어떤 연구와 견줘도 손색없다고 지적하면서 “출판사들이 한국전쟁에 관한 외국 책들을 번역하려 문의해오는데, 10권 가운데 8권 정도는 수준 미달이라고 조언해준다. 한국 학계의 한국전쟁 연구는 그만큼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였음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논의를 경청했다는 점이다. 물론 김형철 교수는 ‘와인 타임’ 이후 모습을 감췄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지루해하지 않고 시종일관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학술대회장에서 자신의 발표가 끝나면 물빠지듯 빠져나가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이 점에서 아산정책연구원 서평모임의 향후 행보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한국학연구센터 센터장은 서평모임마다 책의 주제와 성격에 맞춰 참석자들을 초청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책의 선정은 2개월 전에 마무리된다. 다음번 9회 서평모임의 主賓은 조긍호 서강대 명예교수”라고 말했다. 물론 발제자와 토론자에겐 소정의 금액을 사례비로 지원하지만, 이미 서평모임은 물이 올라 있다.  제9회 서평모임은 또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다.

 

 

김명섭 교수는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을 어떻게 설명했나?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구성된 정전체제는 1차적으로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부활하고 있는 일본의 우익전체주의를 봉쇄하기 위한 한국의 의도가 견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3차적으로는 6·25전쟁을 통해 60만대군으로 성장한 한국군의 북진통일 시도를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도 결합돼 있었다. 이 정전체제가 6·25전쟁 이후의 ‘긴 평화(long peace)’를 가능하게 했다.

6·25전쟁 이후 탄생한 조선·한국 정전체제는 독일재무장과 소련의 위협에 대한 이중봉쇄를 특징으로 했던 유럽의 냉전체제보다 더 복합적인 삼중봉쇄체제였다. 이렇게 볼 때, 코리아 평화체제는 조선·한국 정전체제를 통해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이뤄져야 하는 이중성이 있다. 정전상태를 보다 영구적이고 완전한 평화상태로 대신하고자 하는 이상이 자칫 정전 대신 續戰을 불러오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정전체제의 불완전한 ‘긴 평화’를 보다 완전하고 영구적인 평화체제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체제에 대한 이상이 평화협정에 대한 맹신으로 왜곡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구적 평화체제를 향한 이상은 조선·한국 정전체제의 맹목적 폐기가 아니라 그것의 보전(conserve), 폐기(abandon), 그리고 초월(transcend)을 포괄하는 揚棄(aufheben)를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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