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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와 시인은 세상을 어떻게 볼까?
사진가와 시인은 세상을 어떻게 볼까?
  • 김홍근 기자
  • 승인 2016.05.18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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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는 것만 가까운 것은 아니다
▲ 이광수ⓒ, 인도, 께랄라, 2015.

가까이서 보면 도대체 어떤 게 보인다는 말일까?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다양한 변수들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변수는 좌표와 달리 늘 변화하는 무엇이다. 멀리 있을 때와는 달리 이젠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것들은 시간 속에 흐르는 무한하게 작은 것들이다. 無限小들이다.

여기 역사학자이자 사진비평가인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와 시인이자 항해사인 최희철이 함께 쓴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알렙, 257쪽, 15,000원)가 있다. 시인인 항해사는 이 책에서 ‘사진’은 ‘장면’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고, 한 장의 사진으로 무한히 사유를 지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천착하고 있는 역사학자는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인 시인의 생각을 많은 독자와 널리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렇게 태어났다. 사진비평가인 역사학자는 인도 께랄라, 어둠이 내리는 해변에서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늘 그렇듯 바닷가 풍경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지루하면서, 의외의 신선함을 준다. 이 지루한 그러나 신선한 풍경을 사진가와 시인인 항해사는 어떻게 읽어냈을까. 「아버지와 아들」이란 제목을 단 사진 속 세상을 읽어내는 이들의 독법을 따라가 본다.           
  정리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사진가가 본 세상
낮과 밤 사이의 시간, 한 사내가 아이를 데리고 바다로 들어간다. 아이를 안더니 바닷물을 적셔준다. 아이는 아버지의 품을 파고든다. 父情이 그윽하다. 멀리 배는 보이지는 않지만, 배가 있을 풍경이다. 시간이 밤으로 파고들어가면서 배의 불빛은 더욱 빛난다. 바닷물은 끊임없이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달과의 인력 때문이라지만 한 번도 그렇게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뭔가 내가 모르는 절대자의 힘이 있을 것 같다. 결코 넘치지도 않고 소진하지도 않는 그런 힘 말이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다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조용하다. 언젠가 돌아갈 그 자리는 조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옥이라도 좋다. 또 머무르게 되면 그곳도 익숙해지겠지, 그러다가 또 살 만해질 테고, 못살면 그만이고. 가까이 있는 것만 가까운 것은 아니다. 멀리 있는 것도 이내 익숙해지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장면에 멀리 있는 배들이 끼어든다. 그러면서 하나의 삶에 관한 풍경이 된다.

―시인이 읽은 세상
수평선 멀리 배와 浮漂(buoy)들이 보인다. 그런데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이든 멀리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안 보인다는 것은 모양이 잘 안 보인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기하학적 위치 즉 ‘좌표’로만 보인다. 가령 부표는 근해의 야간 항해에 이용된다. 이때 부표는 먼 곳에서 그저 깜박거리는 점, 즉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부표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감정은 최대한 배제된다. 부표가 몇 초 간격으로 깜박거리는지 빛은 무슨 색이며 홀로 반짝이는지 무리지어 반짝이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고, 모든 것은 항해를 위한 객관적 자료로 취급된다. 航行 정보 중 하나일 뿐이다. 항해사는 기계처럼 부표의 거리와 각도를 측정한다. 하지만 실제 부표 곁으로 가보면 그는 단순히 정보를 알려주는 ‘물체’라기보다 온몸에 藻類와 새의 분비물 그리고 따개비 등을 잔뜩 붙인 살아있는 바다 포유동물 같아 보인다. 금방이라도 숨을 뱉어내며 움직일 것 같다. 가까이 접근하면 부표는 좌표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감정이 되살아난다. 서로가 말랑말랑해 지는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시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잘 보이지 않음’이란 멀리서 볼 때 ‘잘 보이지 않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럼 가까이서 보면 도대체 어떤 게 보인다는 말일까?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다양한 변수들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변수는 좌표와 달리 늘 변화하는 무엇이다. 멀리 있을 때와는 달리 이젠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것들은 시간 속에 흐르는 무한하게 작은 것들이다. 無限小들이다. ‘무한소’는 단순히 크기가 작다는 의미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이미지’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들은 사실은 발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명’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카오스’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곳엔 불변하는 좌표나 공간화된 시간 같은 것이 없다. 자신이 체험하곤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시간과 흥분이 있을 뿐이다.


우린 멀리서 보는 습성이 강하다. 늘 기계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려고 한다. 가령 대형 트롤어선의 조업방식을 보면 바람, 냄새, 水色 이런 것과 관계없이 기계의 힘으로 거대한 그물을 던진다. 사이보그 같다. 그들은 자연을 제압하려고 한다. 이때 항해사를 비롯한 선원은 자신들이 마치 바다와 분리된 것처럼 행동한다. 모두가 ‘딱딱한 조작자’가 되는 것이다. 브리지에서 첨단 전자계기로 수심을 측정하고, 어군을 탐지하며 어획물들이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본다. 모두가 기계적 조작이다. 자신의 감정은 이입될 틈이 없다.
반면 작은 배로 근해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어떨까? 날씨와 수색을 보고 바람과 바다의 냄새를 맡는다. 정성을 다해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재수 없다고 여기는 날은 出漁를 하지도 않으며 불경스럽다고 여기는 짓도 하지 않는다. 그들과 바다의 관계는 감정과 피부가 직접 닿은 ‘촉각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딱딱함’이 아닌 ‘부드러운 조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드러운 조작’이란 기술이 아니라 ‘感應의 세계’라는 말이다. 서로 엉켜서 살아가는 세계다. 漁業이 아니라 ‘漁撈’의 세계,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세계라고나 할까. 삶을 놓치지 않으면서 삶의 터전인 자연도 대상화하지 않는,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자양분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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