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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문학의 허약함에 대해
한국인문학의 허약함에 대해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 승인 2016.05.1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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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한국인문학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말하기 위해서 굳이 증거 자료를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학생이 부족하다는 소리 하나에 대학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물며 권력의 입김이나 돈 냄새 따위를 꼭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왜 이렇게 흔들리는 것일까. 한국의 대학은, 더 정확히는 한국인문학은! 답은 간단하다. 그동안 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 놓은 것이 없기에 지킬 것이 없는 것도 당연지사! 지킬 것이 있어야 싸울 텐데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싸움 한 번 못하고 털리고 당하고 밀리는 것이 한국 인문학의 현 주소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한국인문학이 그 시작부터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연인즉 이렇다. 서양인문학이 동아시아에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인데, 그 때에 서양 학문을 수용하려면 확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인문학이 허약한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다.

첫 사례로 서양인문학의 기초방법론인 문헌학을 일본에 소개한 하가 야이치(芳賀矢一)를 소개하겠다. 그의 말이다. “文獻學의 방법은 희랍과 로마의 언어로 쓴 옛 문헌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 문헌학이라는 것은 본래 문명이 없는 나라에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 문헌학에 있어서는 문헌에서 거둬야할 것이 없으면 연구는 성립하지 않는다. Philologie라는 학문, 곧 문헌학은 어디까지나 옛 문명이 성대했던 나라에 있어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해 놓은 것’이 있어야 가능한 학문이 문헌학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문헌학은 문명이 축적된 국가에서나 가능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가 야이치의 “문헌학이라는 것은, 문명이 없는 나라에는 본래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도 서양고전문헌학자인 뵈크가 앞에 해 놓은 “교양이 없는 국민도 Philosophein(철학하기)은 할 수 있다. 하지만 Philologein(문헌학하기)은 할 수 없다”는 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가 야이치는 1901년에서 1902년까지 독일 베를린대에서 서양고전문헌학의 완성자인 빌라모비츠로로부터 문헌학을 배운다. 하지만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서양고전문헌학에 머물지 않고 일본문헌학을 정립하는 길로 나간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바 ‘일본문헌학’이란 Japanische Philologie의 의미로서, 곧 國學이다. 國學者가 종래 해온 사업은 곧 문헌학자의 사업에 다름 아니다. 단지 그 방법에서 개선해야 할 것이 있고, 그 성질에서 확장해야 할 것이 있다.”

하가 야이치는 문헌학을 국학으로 명명한다. 이는, 하가 야이치가 빌라모비츠와 같은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의 보편 노선을 따르지 않고, 대독일주의를 표방했던 테오도르 몸젠과 같은 역사학자들의 노선을 수용한 결과다. 일본문헌학은 나중에 ‘국수주의’의 노선으로 발전하는데, 그 기원이 여기에 있다.

두 번째 사례는 梁啓超다. 그가 1923년 1월에 발표한 ?治國學的兩條大路?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헌의 학문은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 연구해야 한다.” 양계초의 생각도 기본적으로는 독일고전문헌학의 전통을 수용한 것이다. 예컨대 그가 강조하는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은 독일고전문헌학의 ‘실증주의’ 노선과 궤도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양계초가 1924년 4월에 한 말도 실은 빌라모비츠의 ‘고대종합학(Altertumswissenschaft)’의 중국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서 ‘philologie’는 분켄가쿠를 거쳐 원셴쉐(文獻學)로 수용된다.

두 가지를 지적하겠다. 하나는 양계초도 문헌학을 국학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적 객관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古學으로 취급됐던 전통 학문을 서양고전문헌학의 객관적 방법론을 빌어서 한편으로 서양 학문에 대등한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학술 체계의 중심에 놓고자 했던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국학’이라는 용어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개념으로 이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하가 야이치가 서양고전문헌학의 방법론을 이용해 일본 국문학을 현대 학술 체계로 정초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면, 양계초는 역사에 무게 중심을 둔다.

세 번째 사례는 대만이다. 대만의 사정도 중국 대륙과 대체로 유사하다. 2015년 하버드대에서 출판된 『세계문헌학(World Philology)』의 서문에서 판센왕(Fan Sen Wang)은 이렇게 썼다. “‘시나카 아카데미카’의 역사 분야를 책임졌던 위인케 첸(Yinke Chen)은 하버드와 베르린에서 역사학과 문헌학을 배웠다. 그는 여러 언어들 가운데서 산스크리트어와 몽골어를 중국의 고대 문헌들의 해독에 적용했다. 이 문헌들은 특히 외국의 지명과 인명이 중세의 전승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점들을 지닌 것들이다. (……) 그는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여러 언어들을 다룰 수 있었는데, 이것들 모두 외국에서 습득한 것이고, 특히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다민족성에 대한 자신의 섬세한 감각은 독일고전문헌학(German classical Philology), 혹은 고대종합학(Alterumswissenschaft)과 중세유럽역사학의 상식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밝힌다.”

세 사례로부터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실증’과 ‘근거’를 중시하는 비판정본론의 방법론적인 엄격성과 문헌들을 다룸에 있어서 복합적인 연구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빌리모비츠의 ‘고대종합학’ 이념에서 하가 야이치든 양계초든 첸이든, 그러니까 동아시아 인문학의 기초를 다진 이들 모두가 정신적 계발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일고전문헌학계에서는 부분적으로 강조됐던 국가주의 이념이 동아시아에서는 전면적으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적어도 일본과 중국과 대만의 인문학자들이 고전문헌학의 객관적이고 과학적 방법론을 빌려서 자신들의 고학을 현대 학술 체계에 자리 매김한 것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과 중국학자들의 문헌학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국학이 보편학으로 끌어올려졌는지는 새로운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아직은 ‘국학’이라는 말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일본과 중국은 서양인문학의 기본방법론을 수용해서 적어도 ‘지킬 것을 해 놓은’, 그래서 어지간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학문의 세계를 구축해 놓았다는 점이다. 부러운 대목이다.

한국인문학이 허약한 것은 어쩌면 ‘국학’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학문적 검증 과정과 현대화 과정을 밟지 않았던 혹은 밟을 수 없었던 것과 이 과정에서 국학과 보편학의 치열한 노선 투쟁을 치르지 못한 것의 혹독한 결과일 지도 모르겠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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