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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 지단
소크라테스와 지단
  • 교수신문
  • 승인 2016.05.1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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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새벽에 일어나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경기 중계를 지켜볼 정도의 열성 축구팬이라면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 대부분 알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말고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축구선수 소크라테스 말이다. 그는 이름 못지않게 유별난 선수였다.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는 턱수염을 기른 것은 물론 브라질 선수로서는 드물게 193센티미터의 장신에 의사 면허증도 가지고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상당했으니 말이다.
그는 대표팀 주장을 맡아 브라질 축구 황금기를 이끌었으니 축구 실력도 상당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마티아스 루의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함께읽는책 刊)는 이런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말하자면 축구 경기에서 철학적 명제를 찾아내 이야기하겠다는 의도를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을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으로 데려간다. 지난 기억을 되살려보면 독일 월드컵에서 G조에 속한 한국은 토고를 상대로 원정 첫 승을 올렸고 박지성이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한골을 넣었다. 다만 전 세계 축구팬들이 기억하는 독일 월드컵은 프랑스의 축구 스타 지단에서 시작해서 지단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단은 경기 시작 7분 만에 페널티킥을 월드컵 결승 사상 최초로 ‘칩슛’으로 성공시켜 그의 명성을 재확인시켜줬고, 연장 후반 이른바 ‘박치기’ 사건을 일으켜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팬들을 실망시켰다. 저자는 지단이 페널티킥을 넣으면서 힘차게 돌진하다 갑자기 속도를 늦추고 공을 가볍게 툭 차서 포물선을 그리며 골문 중앙으로 집어넣은 ‘칩슛’ 혹은 ‘파넨카킥’에 대해서도 철학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전설적 축구선수 파넨카가 유로 76에서 선보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는 그 슛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그것이 완전한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임을 강조한다. 그날 파넨카의 슛은 변덕이나 갑작스러운 충동에서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른, 그러니까 “피할 수 없는 순간에 실행하게 될 행동의 규칙에 따라” 이뤄졌다고 말한다. 장 자크 루소 식으로 말하면 ‘규정된 법칙에 따르는 것이 자유’인 셈이다. 지단의 파넨카킥 역시 자유의지가 존재함을 증명해줬고 축구사의 명장면들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다만 경기가 연장전에 접어들지 않았고 어느 한 편이 이기든 승부가 결정 났다면 말이다.

연장 후반,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지단 박치기’ 사건이 일어났다. 유독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축구에서 사람을 머리로 들이받으면 경고를 받거나 퇴장을 당한다는 규칙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지단이 이탈리아 선수 마테라치를 가격하는 장면을 아무도 못 봤다는 데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심판이 못 봤다는 말이다. 마테라치는 쓰러져 있고 경기는 중단됐지만 주심과 부심, 경기장 밖의 대기심까지 그 상황을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 대기심은 모니터를 다시 재생했고 그 결과 지단의 행동이 드러났고, 그 사실을 주심에게 알려준 것이다. 축구에서 비디오 판독을 한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단은 축구 규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부당한 판정을 통해 퇴출당한 셈이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축구 규칙의 잘못된 적용이 아니라 ‘지단의 행동은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 모아진다. 지단의 행동은 사적인 복수의 정당성에서부터 도덕과 정의의 문제까지 제기하고 있다. 사실 축구에서는 수많은 부정이 저질러진다. 상대 선수를 발로 걷어차는가 하면 심지어는 손으로 골을 넣고 점수를 인정받기도 한다. 다만 심판이 그런 행동을 목격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덕과 의무에 따라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플라톤이 『국가』 2권에서 ‘기게스의 반지’라는 우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듯이 투명인간이 돼 법을 피할 수 있다면 정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는가. 저자는 “정의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의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정을 저지르기 때문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인용하면서 이를 지단의 행동에도 적용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지단이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프랑스의 패배에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하는 대신 그 자체로서 폭력적인 행동을 비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에 그의 행동이 잡히지 않았어도 그는 여전히 비난 받을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차를 운전하며 과속을 하다가도 전방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일시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나의 행동은 안전을 위한 것인지 혹은 범칙금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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