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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재건체제’의 뿌리는 만주국 경험에 있었다
5·16 이후 ‘재건체제’의 뿌리는 만주국 경험에 있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5.1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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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개발체제의 기원』 한석정 지음|문학과지성사|518쪽|28,000원

 이 책은 역사사회학의 중요 논제인 국가형성의 외부적 요인, 혹은 후발주자의
관점을 일깨우고자 한다. 한국 등 일부 동아시아의 국가형성은 황무지에서가
아니라, 여러 자원, 특히 식민시대의 도면과 재료, 실행이 사용됐다.

 

시간은 냇물처럼 일정 속도로 흘러갈까? 푸코는 기강의 진화사에서 시간(근대)의 ‘분출’을 언급했다. 한국사에서 60년대도 그런 시기다. 이것은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경제 10위권대로 부상할 산업화, 온 국토를 파헤친 건설의 에너지, 살벌한 남북체제 간(지구상 최후로 남게 될) 냉전 경쟁, (뒷날 건설, 정보 강국을 견인할) 속도의 추구, 당연한 부산물인 생태계의 파괴와 졸속 공사, 개발체제에 대한 향수가 일조한 보수정부들의 탄생 등 한국의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시간대다. 이것은 한국 근세사에서 문제들을 쾌도난마로 해결하며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가 처음 나타난 돌출의 시점이었다.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것일까? 드 세르토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된 서양인들의 역사관에 비해 인도인들의 뇌리 속에 과거가 현재에 ‘켜를 지어 비축돼’ 있다고 했다. 한국의 60년대는 자유당 정부, 한국전쟁, 나아가 일제시기 시간대들이 얹힌 중첩적 국면이었다. 무엇보다, 지도자들의 뇌리에 만주국의 기억이 켜를 지어 존재했다.

이 책은 5·16 군사쿠데타 후 군정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재건체제’(혹은 80년대까지 지속된 불도저 체제)의 뿌리를 식민주의, 특히 만주국(1930~40년대 일본 관동군이 중국 동북지역에 세운 괴뢰국) 경험에서 찾는다. 남북한이 공통으로 기술했던 ‘민족항쟁의 성지 만주’라는 내셔널리즘 담론에 가려 있지만 이 시절 만주는 기실 조선인들의 기회의 땅이었다. 30년대에 약 70만 명의 만주행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이곳에는 비적의 습격과 혹한의 생태계에서 억척같이 농토를 일군 개척 농민들 이외에도, 만주국 하급 관리와 장교, 중소기업인, 아편장수까지 별별 조선인들이 존재했다. 일부는 일본인 다음의 ‘2등 공민’ 행세를 하기도 했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 후 고학력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징집이 초래한 공백을 파고들어 중하위급 행정과 경영의 경험을 쌓았다. 만주 악단들에도 결원이 생겨 일본, 미국 유학 출신의 조선인 음악가들이 만주에서 대거 일자리를 얻었다. 해방 당시 조선인 인구는 약 2백만 명에 이르렀다.

만주에서 한국사회에 전해진 흐름은 필자가 ‘만주 모던’이라 명명한, 압축 성장에 적절한 경직성 근대다. 이것은 관동군에 의한 신속한 산업화와 도시 건설 이면의 에토스인 하이 모던(과학기술·생산에 대한 예찬과, 자연에 직선과 방사선을 유감없이 긋는 정신), 그리고 그 토양에서 변형과 개척이 혼합된 이념적·실천적 구성물이다. 요컨대 20세기 전후를 연결하는 통시적 개념이다.
해방후 귀국한 만주 출신 일부 인사들은 만주국의 계획경제와 국방국가를 모델로 치열한 남북한 체제경쟁을 치르며 속도전으로 도시와 공단을 만들어 나갔다. 이들은 군부뿐 아니라 교육, 이념 부문에서도 중추적인 성분이 됐다. 일부는 반공, 화랑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관여하는 등 재건체제의 전도사가 됐다. 만주 음악단 출신들은 예술세계를 이끌었다.

이 책은 역사사회학의 중요 논제인 국가형성의 외부적 요인, 혹은 후발주자의 관점을 일깨우고자 한다. 기존 논의에서 식민주의에 의한 확산과 후발주자들의 취사선택은 간과된 편이다. 한국 등 일부 동아시아의 국가형성은 황무지에서가 아니라, 여러 자원, 특히 식민시대의 도면과 재료, 실행이 사용됐다. 만주국, 중국 북·중부의 괴뢰국을 포함, 일본제국 내 여러 식민국가들은 메이지 국가형성의 경험을 살려 조립형 주택이 만들어지듯 용이하게 세워졌는데 만주국은 이런 연쇄과정의 중요한 고리다. 전후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에는 일제시기의 식민국가와 해방후 미군정, 그리고 제3의 자원인 만주국의 청사진과 재료가 일부 사용됐다. 재건체제는 만주국의 영향으로 통제경제와 인적·물적 동원 뿐 아니라, 국토를 갈아엎는 역동, 민족을 위한 강건한 신체와 남성성의 모색, 대중예술의 통제 등이 추진됐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이뤄졌다.

해방후 미주행 이주민들이나 해방전 만주행 이주민들을 굳이 친제국주의적 시각으로 기술할 필요는 없다. 후자의 후예인 재중동포(조선족)는 전 세계로 뻗어나간 화교들처럼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글로벌시대에 적응하고 있다. ‘만주 모던’은 다중적인 뜻을 지닌다. 빈곤을 탈피하려는 추격형 동원은 기록적인 성취를 초래했으나, 그 자신감과 속도는 뒷날 전국토를 시멘트의 숲으로 조성하고 대형 참사들을 불러왔다.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한 냉전 경쟁은 지식인들에게 숨 막힐 질곡을 초래했으나, 남한이 후일 세계체제의 상위권으로 도약할 동력이 됐다. 경제력, 군사력뿐 아니라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북한에 뒤졌던 남한은 이런 노력으로 북한을 제쳤다. 마치 수십 년간 국내시장에서 생사의 경쟁을 벌였던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80년대부터 해외시장을 석권했듯 장기간의 남북한 경쟁은 남한에게 여러 방면의 해외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이 성과는 권위주의 체제 출범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 책은 가끔 친일 시비로 온 나라가 비등하는, 한국사회의 인화성 주제인 식민주의와 대면, 객관적 평가를 시도한다. 30년대 만주는 조선인과 일본인 약 135만 명의 이주, 중국 본토에서 약 1천만 명 이상의 이주(1890년에서 1945년까지 2천5백만 명)가 빚은 융합의 공간이었다. ‘동양의 파리’ 하얼빈에는 수십 개의 민족집단과 언어가 공존했다. 20세기 전·후반에 걸쳐 동아시아의 교류를 대거 확산시킨 것은 일본 식민주의다.

이것은 조선, 일본, 만주로의 쌍방향 이동을 합쳐 약 9백만 명의 이동을 초래한 소용돌이의 역사다. 모든 문화의 기원이 제국주의라는 지적이 있듯, 일본 식민주의의 한 의미는 여러 아이디어나 제도의 광범위한 확산이다.
한국사회에서 식민주의는 암흑이라는 부정적인 가치와, 근대는 발전·해방이라는 긍정적인 가치와 고착돼 있다. 이것은 내셔널리스트들이나 그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공통된 현상이다. 식민주의나 근대는 중립적으로 논해야 한다. 학문은 늘 새로운 주장이 이어지는 열린 세계다. 식민주의는 타자들과의 비교와 멸시를 통해 식민자들의 근대적 주체 형성에 공헌했지만, 베트남의 호치민 등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각성의 계기이기도 했다. 또한 근대는 합의가 어려운 개념이다. 일단의 학자들은 헤겔의 단선적 근대론에 내재하는 진보의 광풍, 폭력, 타자 설정 등을 질기게 지적해왔다. 울리히 벡의 ‘세계 위험사회론’은 근대의 낙관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근대는 자연과 인간집단을 동원, 변형시킬 수 있다는 세계관이다. 그 결과, 자연을 신속하게,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한 힘이기도 하다.

식민주의는 변형의 계기다. 식민주의는 근대에의 노출을 초래하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식민 지배자가 자신과 ‘비슷하나 꼭 같지는 않은’ 인간형을 생산한다는 호미 바바의 강력한 주장은 서구에서 비서구, 단일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일방적 흐름을 가정하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수용자라는 요인을 놓치는 한계가 있다. 식민주의는 단순히 피식민자들의 착취, 혹은 식민자들의 시혜(교육, 문명의)의 장으로만 볼 수 없다. 식민주의는 피식민자들에게 변용의 기회이기도 하다. 일부 피식민자는 식민자들이 구사하는 담론, 기술, 도구를 취사선택, 땜질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후일 구 식민자까지를 추월할 수 있다. 요컨대, 식민주의는 고난과 유랑 너머 차용과 토착화, (일부 인사들에게) 도약의 계기이기도 하다.

 

한석정 동아대·사회학과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았다.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만주-동아시아 융합의 공간』,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 등을 썼으며, 『주권과 순수성: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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