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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지위 향한 경쟁·평가 만연” … 美·中·日도 ‘위험’
“연봉·지위 향한 경쟁·평가 만연” … 美·中·日도 ‘위험’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5.09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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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붕괴’ 진단한 <녹색평론> 148호(2016년 5-6월호)

프라임사업 발표로 대학이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격월간 <녹색평론>이 ‘대학의 붕괴’를 특집으로 들고 나왔다. 일본 대학의 지각 변동과 위기론을 면밀히 점검해오던 김종철 발행인의 기획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대학 위기를 진단하는 목소리는 여러 곳에서 제기돼 왔다. 계간지들도 점검하긴 했지만, <녹색평론>은 미온적인 목소리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날선 접근을 보였다.

‘대학의 붕괴’ 특집에는 모두 일곱 편의 글을 실었다. 한국 대학의 문제만 지적하기보다는 중국, 일본 등의 사례도 살폈고, 나아가 ‘프라임사업’으로 대학 학문 간 지각변동이 예상되는 것과 관련해 인문학 교육의 본질적 의미를 천착한 글도 배치했다. 「고난의 시대, 몰락한 대학」(고부응), 「한국의 대학과 영어강의」(잉그리드 필러·조진현), 「중국 대학의 현실,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황종원), 「대학개혁 망국론」(우치다 타츠루), 「우리가 아는 대학은 사라지고 있다」(네이선 하든), 「인문학 교육과 민주주의」(마사 누스바움), 「일본의 ‘영어화’ 정책, 망국으로 가는 길」(세 테루히사·시라이 사토시)이 그런 글이다.

기업이 대학을 인수한 후 각종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중앙대의 고부응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오늘날 대학이 전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겨냥했다. “현재 대학은 끔찍한 미몽의 상태에 있다. 경제가 활성화될 전망도 없이 따라서 일자리에 대한 전망도 없는 상태에서 대학은 더욱더 기업을 위한 직업훈련소로 변하고 있다”라고 진단한 그는 “자본주의 쇠퇴기에 사회 자체가 지옥과 같은 고통의 장이 되듯이 대학 역시 암흑의 세계에서 방향을 잃고 서서히, 가끔은 비판적 반성이 있겠지만 그 반성도 별 효과는 내지 못하면서 몰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 대학이 밟고 있는 경로가 ‘붕괴와 몰락’의 길이라는 묵시론적 지적이다.

잉그리드 필러·조진현 교수와 세 테루히사·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글은 공통적으로 대학을 휘몰아치고 있는 ‘영어 강의’ 정책을 겨냥하고 있다. 잉그리드 필러와 조진현은 영어강의가 ‘세계화’의 불가피한 흐름이라기보다 “사회경제적 동기들이 그 속내를 감춘채 서로 맞물려 작동한 결과로 강요됐다”라고 보고 있다. 즉 “영어의 확산은 ‘언어의 자유시장’이 초래한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적인, 조직화된, 계획된 정책’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그것이 대학에 조장한 것은, “학생·선생·연구자로서 끊임없이 영어로 학문을 수행해야 할 강박적 ‘필요’ 때문에, 대학인들은 그들의 비판적 능력을 학문의 내용보다도 영어라는 매개 수단을 익히는 데 쏟아붓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주식회사로 변모하는 대학의 미래

세 테루히사와 시라이 사토시의 글은 이들의 대담에서 가져온 것으로, 제목 자체가 모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어째서 ‘영어화’ 정책은 망국으로 가는 길일까. 이들의 대화를 따라가보면, ‘영어화’ 정책의 발상 아래 도사린 것은 ‘언어라는 것은 도구에 불과하다’라는 인식이다. 시라이 교수는 이를 내면화한 신흥 부르주아의 자기인식 속에는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역사를 짊어진 존재라는 인식,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살아간다는 인간관이 처음부터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영어화’ 정책이라는 건,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생략한 이들이 추진하고 있는 셈인데, 이들은 학교에서 (일본)역사 따위는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발언을 하고 있을 정도다.

그 자신 중국 유학 경험을 지닌 황종원 단국대 교수(철학과)는 중국의 대다수 4년제 대학이 우리처럼 인문학을 홀대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중국 인문학의 ‘얼굴’이라 할 베이징대의 경우에는 문·사·철 각 학과마다 정식 교수만 60여명이 넘는다. 물론 중국 대학들의 이런 인문학 중시는 중국이 정치적으로 여전히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중국 유수의 대학들이 나름대로 오랜 인문학 연구 전통을 이어온 점도 또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황 교수가 보기에 중국은 ‘교육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지만, 실현하기엔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가장 큰 장애요인은 대학교육에 대한 중국정부의 과도한 통제와 개입이다. 아마도 <녹색평론>의 ‘대학의 붕괴’ 특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길 글이라면, 우치다 타츠루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의 글일 것이다. ‘인문계 학부 폐지의 어리석음’이란 부제를 단 그의 글은 대학개혁이 ‘망국론’임을 역설하고 있어서, 프라임사업 이후 예상되는 한국 대학의 인문학 지각 변동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이 사반세기 동안에 걸친 국공립 대학의 제도 개혁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대학의 주식회사’였다. 총장이 ‘CEO’, 정부와 대기업이 ‘주주’, 수험생과 보호자는 ‘시장’이다. 산학협력에 의해서 연구자금을 모집하고 글로벌경제에 최적화된 戰力을 배출해서 시장에 호감을 주면 지원자가  확보될 수 있다. 그러한 영리기업의 발상을 그대로 대학에 적용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우치다 타츠루의 지적은 우리에게 더이상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이미 한국 대학도 같은 경로를 밟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주식회사’가 되고 있다면, 이 과정에서 교수회는 어떻게 됐을까.

“인사, 예산뿐만 아니라 교학이나 입시, 졸업 판정에 대한 결정권까지 박탈돼 거의 빈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결정은 총장에 의해서 수직적으로 내려지고, ‘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연구·교육은 존재이유가 없어졌다. 그러한 논리가 버젓이 통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어떤 결과가 뒤따랐을까. 우치다 타츠루에 의하면, 당연히 예견된 것이지만, 일본의 학술연구 수준은 급격히 떨어지고 말았다. “학술논문 편수는 연구 수준을 가리키는 지표의 하나인데, 2000년경에는 미국에 이어서 세계 2위였던 일본의 논문 편수는 독립행정법인화가 시작되면서 급감해 중국, 독일, 영국에 뒤처지고 조락의 길로 들어섰다. 연구 시간을 제도 개혁을 위한 회의나 서류 작성 등에 빼앗기는 상황에서 연구성과가 감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일본 대학, 일본 사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닥쳐올까.

“학교가 ‘상품’을 파는 점포라면, 인가가 없는 학부나 학과가 도태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국립대학에서 교양학부가 폐지되고, 이번에는 인문계의 교육이 타격을 받아 숨통이 끊어지려 하는 것은, 학교교육에 시장원리가 도입됨으로써 일어나는 필연적 귀결이다.”

이 필연적 귀결로부터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우치다 타츠루는 이 대목에서 인문계 쇠퇴가 심각한 한국 대학의 글로벌화를 언급하면서 섬뜩한 경고를 던진다.

‘쓸모있는 기계’만 양산하는 대학교육 ‘위기’

“대학이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애착도 관심도 없이 오로지 글로벌자본주의에 자신을 최적화시켜 높은 연봉과 지위를 겨냥하는 학생들의 경쟁과 평가를 위한 장소로만 기능하는 국가에, 미래가 있을까? 내가 만난 한국의 교육자들은 그것을 굉장히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간이 배출된다면 나라의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를 담당할 성숙한 시민’은 자신의 공동체에 강한 애정을 느끼거나 귀속의식을 가지고 나라의 제도나 문화를 계속해서 지지하는 책임감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미국 대학의 급격한 변화를 전제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모색한 네이선 하든의 글은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고등교육의 지각변동, 예컨대 2012년 하버드대와 MIT가 발표했던 ‘에드엑스(edX)’라는 온라인교육 사업, 그리고 온라인 MOOC 강의 등이 가져올 대학의 급격한 축소, 그에 따른 교수 수의 급감 등 현실적인 변화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를 진단하고 있다. ‘대학의 종언’이라는 사태가 가까워지고 있지만 결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카고대 교수의 글은 인문학 교육이 어째서 민주주의에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 그 역시 지금 인류가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논의를 끌어나간다. 그런데 이 위기는 글로벌 경제의 위기가 아니라 “암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민주적 장치통치의 미래에 훨씬 심각한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큰 위기”다. 무엇일까. 세계 전역에 걸친 교육의 위기다.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 목마른 나머지 각국과 그 교육시스템들은 민주주의 건전한 존속을 위해서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치는 것을 방기하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대부분의 나라는 곧 스스로 생각하고, 전통을 비판하고, 타자의 고통과 성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시민들이 아니라, 그냥 쓸모 있는 기계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위기를 양산하는 교육의 급진적 변화 내용이 바로 초중등 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축소되고 있는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라고 지적한다.

마나 누스바움의 말을 상기해보자.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 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쁜 것이다.”

혹시 지금 환호하고 있는 ‘프라임사업’ 수혜가 장차 ‘무지만큼 나쁜’ 사실적 지식만을 다음 세대에게 심어주는 것은 아닐지, 그런 성찰이 대학과 정부에 있기나 한지 궁금하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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