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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같은 역설
수수께끼 같은 역설
  •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16.05.0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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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영문학

이 글은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의 신간 『고전: 인간의 계보학』(한길사, 2016.4)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임철규 연세대 교수

풍요를 약속하는 이상향은 너무나 아득한 것처럼 보인다.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라캉은 욕망은 결코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될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욕망의 전차는 브레이크와 종착지가 없다”는 것이다. 작가 박경리도 “욕망의 완성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어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에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영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욕망이 결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상향과 유토피아 역시 결코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역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아픈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역사는 또 한편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향하는 욕망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소설사에서 처음 출현한 새로운 소설” 『토지』는 장르를 수립하기도 하고, 이를 폐기하기도 한다. 아니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문학 고유의 본래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처럼 민족의 수난과 여기에 얽혀있는 개인의 비극적인 삶과 그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고, 백과전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 전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밖의 어떤 장르의 개념도 개입하기를 원치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숱한 ‘한’과 슬픔을 안고 살았고, 또 죽어간 인간들의 삶에 대한 애도이다. 그들의 삶에 바치는 悲歌다.

그러나 이것이 『토지』가 우리에게 남기는 모두이자 마지막일 수는 없다. 역사가 미쳐날뛸 때, 우리의 한은 더욱 슬프게 춤춘다. 지리산의 한에 대한 강연에서 작가는 『토지』의 “기둥”을 악양면 평사리에 세운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자신은 “누군가의 도구”로서 그 기둥을 세웠던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전신이 떨렸다. 30여 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라고 말했다. 작가가 “누군가의 도구”라고 말했을 때, 그 누군가는 신과 같은 어떤 단독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 전체를 가리킨다. 그녀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도구가 돼 “아름다운 세상” 즉 인간들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가치를 존중하는 세상, 생명체들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인정해주는 세상” 그리고 한때 풍요를 약속하는 이상향이었던 악양 평사리 같은 “광활하며 비옥한 땅”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꿈꾸기를 노래하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아주 중요한, 그리고 아주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잃기 전까지는 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잃었기 때문에 낙원이라는 것이다. 한때 풍요를 약속했던 광활하며 비옥한 땅, 지난날의 악평 평사리와 이상향은 잃었지만, 그러나 잃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은 이상향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노스텔지어는 “정확히 그 부재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관계”라고 규정했다. 말하자면 고향은 그 ‘부재’를 통해 ‘존재’한다는, 즉 ‘부재’는 ‘존재’를 전제한다는 그 역설적인 관계의 성격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것이 성취되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아니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향한 욕망이야말로 작가의 말처럼 우리에게 또 한편 “축복”일지 모른다. 이상향은 잃어버린 것이지만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연민’이, 그리고 ‘사랑’이 그 터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그런 ‘고향’을.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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