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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투쟁, 기억의 정치
기억투쟁, 기억의 정치
  •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 승인 2016.05.0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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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 설한 편집기획위원

4월과 5월은 우리 현대사에서 유난히도 아픈 기억들로 점철된 달이다. 4월은 4·19혁명, 제주 4·3항쟁, 4·16 세월호 참사로, 5월은 5·18 민주화운동, 5·16 군사정변, 그리고 5·23 노무현 죽음 등으로 온통 정치적 기억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속적인 현안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논쟁, 위안부 문제 등과 함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과거에 대한 시각과 평가의 문제, 즉 우리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 그래서인지 세월호 참사 2주기를 계기로 다양한 기억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현재화한다. 과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게다가 개인의 정체성은 기억을 통해 형성되며 기억의 공유를 통해 수많은 ‘나’는 ‘우리’가 된다. 그러니 삶은 기억의 축적이며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를 재현하는 기억의 과정에서 기억주체와 기억행위는 사회적 상황과 맥락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사회적 구성물이며 맥락 의존적이다. 이처럼 기억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특히 집단적 기억은 그 자체로 권력투쟁의 장이 된다. 역사는 승자와 가해자 그리고 패자와 피해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망각되기 때문이며, 또한 현재 기억되는 것만이 역사가 되고, 역사는 강자의 관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과거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각 주체는 자신에게 중요하고 유리한 것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며, 선별된 과거만을 전통과 유산으로 수립한다. 심지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창조하거나 왜곡·제거·조작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국가권력이나 지배집단에 의해 공식기억으로부터 배제된 기억은 인정을 위한 기억투쟁을 전개하며 대항기억이 된다. 저항하지 않으면 잊혀지기 때문이다.

기억투쟁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가 되기 위한 투쟁이며 진실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투쟁이다. 그래서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란 밀란 쿤데라의 말은 가슴깊이 다가온다. 기억이야말로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이들의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는 고통스럽고 지난하게 전개된 이런 기억투쟁과 나름의 성공 사례가 꽤나 존재한다. 기억을 재생하고 유지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제는 집단적 의례나 제도, 상징이다. 따라서 그 동안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의 해소는 제도적이고 행정적인 관점에서 주로 진행되어 왔다. 행정적인 보상과 함께 각종 의례적인 기념행사, 기념공간, 조형물 등 가시성에 의존한 매체의 재현을 통해 대항기억은 국가화되고 제도화됐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화는 트라우마를 단지 대상화할 뿐 치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사 관련 보상법이 만들어지고 국가의 기념일이 되고 제도화되면서 오히려 사회적 기억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기억은 역동성을 상실한 채 정체되고, 제한됐으며, 형식적이 돼 버렸다. 결국 기억의 제도화는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형태로 과거를 재현할 뿐, 참혹했던 과거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게다가 역사적 기억의 파편과 저항과정의 상처마저 소거해 버린다.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 없는 민족이며, 박제화된 기억에 안주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우리는 오랜 세월 기억할 것과 잊어야 할 것을 국가가 지정해 주는, 즉 기억이 조종당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망각과 청산의 정치로는 그리고 역사적 기억이 표백된 의례나 제도, 상징으로는 아픈 과거가 극복되지 않는다. 아픈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대면하고 직시하면서 자기 성찰과 비판을 통해 이를 이겨내는 것이 기억의 정치다.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물론 문화적으로 소비만 되고 낭만화되는 기억을 경계해야 하며, 기억이나 역사에 대한 지나친 정치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래로부터의 지속적인 기억투쟁을 통해 기억의 정치를 내면화해야 한다.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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