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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적 歷史像 비판 … 지구사적 시각에서 바라본 근대
유럽중심적 歷史像 비판 … 지구사적 시각에서 바라본 근대
  • 교수신문
  • 승인 2016.04.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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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대분기: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 세계 경제의 형성』 케네스 포머란츠 지음|김규태·이남희·심은경 옮김|김형종 감수|에코리브르|686쪽|36,000원

 

16세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국제무역에서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경제 성장이 이뤄졌고 그 역동성 또한 유럽에 못지않았다. 적어도 18세기말까지 유럽과 이들 지역 사이에 경제적 격차는 거의 없었다.

서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 경제수준의 차이는 언제부터 나타났는가. 서구 학자들은 16세기 이후 두 지역의 격차가 심화됐으며 그것은 유럽사회 내부의 여러 역동적 요인들에 의해 가속됐다고 본다. 제도론자들은 효율적 시장과 사유재산권을 강조한다. 이들 제도가 시장에서 거래 비용을 줄이고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해 산업화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근래 제도적 해석은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포머란츠(K. Pomeranz)의 이 책은 유럽중심적 歷史像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연구다. 포머란츠는 18세기 서유럽(잉글랜드)과 양쯔강 델타지역의 경제변화를 비교한다. 그의 결론은 간결하다. 18세기 두 지역 경제는 농업생산에서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18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는 인구증가, 에너지비용 증가 및 노동강화에 따라 생태환경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같은 시기 서유럽도 비슷한 길로 들어섰다. 그럼에도 잉글랜드가 중국과 다른 역사적 경로를 밟은 것은 신대륙의 해외자원과 값싼 석탄을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유럽 또한 중국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서유럽과 중국이 성장과 침체의 ‘大分岐(great divergence)’로 나간 시기는 19세기 이후라는 주장이다.

서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로
포머란츠는 18세기 잉글랜드와 중국의 양쯔강 델타지역을 횡단 비교한다. 종래의 통설은 중국의 농업생산성이 유럽보다 낮은 수준이었다고 본다. 델타지역에서 인구 증가에 상응하는 노동생산성 향상은 없었고, 노동투입량 강화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했다. 이는 생산성 향상 없는 생산증가, 즉 ‘과밀화(involution)’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양쯔강 델타지역에서 생산과 유통 확대는 오직 가족원의 不拂勞動에 힘입은 것이었다. 노동절약형 수단의 이용은 불가능했고, 노동은 저생산성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포머란츠는 생태위기에 직면하기 이전 중국의 농업경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17, 18세기 중국에서 농업노동자의 임금은 생존비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노동생산성도 정체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인구증가 자체가 농업 발전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포머란츠는 18세기 말 중국이 생태적 위기의 악순환에 빠진 데 비해 서유럽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탐색한다. 농업, 수공업, 생활수준, 과밀화 현상에 이르기까지 서유럽과 양쯔강 델타지역은 비슷한 현상을 보여줬다. 서유럽도 중국 못지않게 생태환경의 위기에 접근하고 있었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삼림이 파괴되고 숲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잉글랜드가 궁극적으로 양쯔강 델타지역과 ‘대분기’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강제지배 때문이었다. 중심부에 필요한 식량과 원료 공급이 가능해졌다. 이에 힘입어 중심부 노동력의 구조적 재배치도 이뤄졌다. 노동력의 재배치가 중요했던 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촉진한 것은 값싸고 풍부한 석탄이었다.
중국에는 신대륙과 같은 대안이 없었다. 양쯔강 델타지역은 그 발전을 제약하는 토지압력을 넘어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주변부를 창출할 수 없었다. 델타지역 배후지는 후난, 후베이, 안휘성 등이었다. 그러나 신대륙과 달리 이들 지역은 중심부 공산품 소비시장으로 변모하지 않았다. 배후지가 오히려 상품 생산지가 됐다. 석탄은 변경지역인 섬서성에서만 주로 채굴됐다.

‘근면혁명’을 보는 눈
포머란츠는 18세기 두 지역의 ‘근면혁명’을 살핀다. 이 말은 1994년 드브리스(Jan de Vris)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서유럽의 생산자들은 일정한 생활수준에 도달하면 휴식을 추구하는 전산업적 노동관행에서 벗어나, 소비 충족을 위해 더 오래 노동하는 경향을 보여줬다. 드브리스는 이 변화를 ‘근면혁명’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말의 학문적 연원은 한 세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 일본의 하야미 아키라(速水融)는 촌락조사서를 분석해 도쿠가와시대 일본 농촌에서 인구가 증가하는 데 비해, 가축이 감소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는 농업 분야의 자본투입량 감소를 뜻한다. 농민은 가축을 기르는 데 자본을 투입하는 대신,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 강화를 통해 인구증가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노동집약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야미는 자본집약적 방식에서 노동집약적 방식으로의 변화를 ‘근면혁명’이라 불렀다.

도쿠가와시대에 자본투입량이 줄었음에도 농민의 생활수준이 상승한 것은, 축력을 인력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농법 보급, 농기구 개량과 함께 농민의 노동시간이 연장된 데 따른 결과였다. 근면이 미덕이라는 노동윤리도 확립됐다. 지배세력의 수탈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면, 생활수준 상승, 생산성 증가, 노동윤리 확립, 생산증가의 선순환구조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하야미의 뒤를 이어 스기하라 가오루(杉原薰)가 동아시아 일반의 노동집약적 경제발전론을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16~18세기 동아시아의 인구증가는 발전을 가로막는 병리현상이 아니라 인구를 먹이고 효율적인 노동 훈련을 계발한 ‘동아시아의 기적’이며, 이는 19세기 산업화를 뜻하는 ‘유럽의 기적’에 비견할 만한 경제적 성취였다. 포머란츠는 바로 이 스기하라의 해석에 깊이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드브리스의 근면혁명론은 18세기 서유럽의 수요증가현상에 자극받은 연구다. 특히 노동자들이 임금수준이 낮은데도 높은 소비수준을 보여주는 수수께끼를 해명하려는 시도다.
근면혁명론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전에 연간 노동시간 증가가 있었고 이는 새로운 소비재 수요에 따른 결과다. 수요의 자극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전의 생활과 다른 노동윤리를 발전시켰으며 이와 함께 가정의 생산자원을 재배치해 생산증가를 꾀했다.
그러나 포머란츠는 서유럽의 근면혁명이 과연 일반적 현상이었는지 되묻는다. 이와 동시에, 그는 양쯔강 델타지역에서 농민가족의 직물생산과 과외작업을 근면혁명으로 인정한다. 서유럽에서 근면혁명의 영향을 줄이고 델타지역에서 근면혁명의 성과를 높임으로써 두 지역의 유사성을 강조하려는 전략이다.

유럽중심적 歷史像의 대안?
지난 한 세대에 걸쳐 중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세계의 공장’으로 떠올랐다. 포머란츠의 『대분기』는 중국의 대두에 자극 받은 저술이 분명하다. 그는 지구사적 시각에서 근대세계의 형성을 성찰한다. 유럽이 일찍 근대화과정에 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유럽과 다른 지역의 관계에 영향을 받으면서 진행됐다. 우선 16세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국제무역에서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경제 성장이 이뤄졌고 그 역동성 또한 유럽에 못지않았다. 적어도 18세기말까지 유럽과 이들 지역 사이에 경제적 격차는 거의 없었다.

다음으로, 포머란츠는 유럽의 특이성을 외부요인, 즉 아메리카 대륙을 전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18세기 인구 증가에 따라 세계의 여러 경제권은 생태적 한계에 직면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토지부족의 위기를 노동집약적 방식을 통해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노력이 있었음에도 이 지역은 토질 악화와 노동생산성 저하라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에 비해, 유럽은 신대륙을 배타적으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값싼 석탄을 이용해 증기기관 도입 등 자본집약적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오늘날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18세기 생태위기에 대처한 노동집약적 방식인 근면혁명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토지와 자원을 서양인만이 전유하던 시대가 지나면서, 동아시아는 서구의 자본집약적 방식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전통인 노동집약적 전략을 혼합해 성공을 거뒀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생태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학자에게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절실한 소망이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근면혁명과 ‘지리적 행운(geographical luck)’을 기계 및 증기기관과 연결한 경제활동의 분위기는 시장지향적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는 점이다. 과연 오늘날 중국의 경제발전을 자원과 에너지 절약적인 전략에 바탕을 뒀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중국의 등장은 두 세기 전 유럽의 성장전략과 다른 그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영석 광주대·영국사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세기 영국 사회사 및 노동사 분야를 오래 연구해왔다. 저서로는 『사회사의 유혹』(전2권), 『공장의 역사:』. 『지식인과 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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