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2:15 (금)
사고-보상 프레임에 허우적 … ‘공공기억’의 힘 돌아봐야
사고-보상 프레임에 허우적 … ‘공공기억’의 힘 돌아봐야
  • 김명희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사회학
  • 승인 2016.04.25 16: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_ 사회과학에 던진 몇 가지 성찰

2014년 세월호 참사는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이 될 커다란 외상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진실 규명이 답보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사태 해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세월호의 침몰’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진행된 부인과 망각의 정치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홀로코스트 부인과 같은 부인(denial) 문화가 폭넓게 형성돼 있음을 깨닫게 한다. 코헨(S. Cohen)은 『States of Denial』(2013)에서 부인 개념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가 인권침해에 눈감는 현상을 설명했다. 『States of Denial』에는 ‘부인하는 국가’라는 뜻과 ‘부인하는 상태’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다. 즉 인권침해의 가해자이면서도 그런 행위를 부인하는 국가(와 가해자들)와 인권침해와 인간의 사회적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일반 대중의 경향이라는 이중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인의 문화에 속한 모든 개인은 곧 잠재적인 방관자가 될 수 있기에, 가치중립적인 관찰자의 위치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참사 그 이후, 파편화된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록하기 위한 인문사회과학계의 여러 노력 또한 더 이상 역사의 시계를 세월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을, 관찰자에서 참여자로의 위치 전환을 촉구하는 세월호의 정언명령에 응답하기 위한 지적 노력과 반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아직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참사 직후 많은 이들이 예감했던 ‘망각의 정치’와 ‘사회의 침몰’은 세월호 이전의 지적 관행과 무관하지 않을 뿐더러, 우리사회가 당면한 지성의 위기, 곧 학문의 위기를 고스란히 비춰 주는 거울효과가 아니었던가?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이한 지금, 세월호 참사가 인문사회과학에 남긴 과제를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한 까닭이다.

첫째, 돌아보자면 지난 2년, 이른바 ‘세월호 지우기’에 개입했던 지적 경향들은 ‘사회과학 없는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과 대면케 했다. 대표적으로 4·16 참사에 대한 해석을 주도했던 사고-보상 프레임은 우리 사회의 지적 수준과 과학문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줬다. 사고-보상 프레임은 사건 발생의 인과관계를 우연적인 선후관계로 치환함으로써,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과 애도의 물결을 방해하는 강력한 인식론적 장치로 기능했다.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가 났으니 수학여행을 없애면 된다’는 식의 비상식적인 담론이 횡행할 수 있었던 것도, 생명 구조 실패의 귀책을 개별 행위자들에게 전가하는 책임의 부인 행동도 사고-보상 프레임에 내재한 이른바 ‘팩트주의’의 인지적 오류를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사고-보상 프레임의 한계는 전문가주의에 일방향으로 의존하는 ‘사회 없는 치유’담론의 맹목성에서 그 절정을 드러냈다. 지체된 진실규명 국면이 클라인(N.Klein)이 말한 ‘재난자본주의’의 경향과 조응하면서, 고통의 사회적 차원이 의학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는 재난의 의료화(medicalization) 현상을 수반한 것이다. 의료의 기술적 처방이 사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대체할 때 생존자와 유가족들에게 행해진 약물치료와 상담치료의 효력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2015년 ‘4·16 인권실태조사’결과는 청소년을 일방적 보호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보호주의가 생존 학생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2차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근 많은 외상 연구는 사회적 외상을 개인적이고 의학적인 문제로 다뤄왔던 역사가 자칫 피해자를 수동적 존재로 대상화하고, 다층적 행위자들의 공적 책임을 묘연하게 하는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라쉬(C. Lasch)의 말을 빌리자면, “인과응보의 正義가 치료적 正義로 옮아감에 따라” 역설적으로 “도덕적 책임감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세월호 참사의 진행 과정은 협의의 기술적 합리성이 광의의 과학적 합리성을 대체함에 따라 과학이 기술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되레 기술이 도덕화되는 학문의 위기를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줬다. 이러한 형국을 뒤르케임이 말한 ‘지적 무정부상태’에 비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학이 상세한 주제에 대해 수많은 연구들로 전문화될 때, 하나의 통합 과학이나 서로 연대의식을 갖는 단일과학으로 전체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일찍이 우려하면서, 공통의 목적 하에 지적 분업을 조율해갈 학문 영역이 필요함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날 성장과 경쟁력 강화에 초점이 맞춰진 융복합 정책이 맹목적으로 추구돼온 응용과학에 제동을 걸고, 연대의식을 형성하는 기능을 과연 담당할 수 있을까? 거꾸로 세월호 참사가 남긴 인문사회적 과제를 달성하기위해서는, 인문사회적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성찰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긴요한 것은 아닐까?

셋째, 세월호 참사가 남긴 가장 어려운 숙제는 생명 구조와 참사의 대응 과정이 보여준 직업윤리의 실종과 사회 전반에 팽배한 도덕적 무관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즉 ‘우리 안의 아이히만’의 문제와 정직하게 대면해가는 범사회적 반성이 절실한 이유이다.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홀로코스트 이후의 사회학을 주창하는 바우만의 통찰을 빌려오자면, 도덕적 충동이 무화되는 것은 행위자들 사이의 물리적·정신적 근접성(proximity)이 손상될 때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인자가 되고, 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항의하지 않는 방관자가 되는 것은 관료적 분업에 입각한 사회적 분리 과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유가족을 ‘순수 유가족’과 ‘불순한 유가족 ’으 로 , 또 ‘ 특 권 층 ’으 로 정 신 적 으 로 ‘ 분 리(segregation)’시키는 것도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분리된 사회적 공간에서 추상적 범주로서의 ‘타자’는 내가 아는 ‘타자’와 전혀 소통하지 않게 된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능력은 아주 크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사회적 고통은 지금의 경험적 세계를 넘어, ‘ 너머의 삶’에 다가설 통합된 인문사회과학의 개입과 상상력을 그 어느 때보다 요청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시민들의 자원봉사와 성금으로 꾸려진 ‘4·16 기억저장소’, 1천 회가 넘는 풀뿌리토론에 기초해 제정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 선언’과 같은 시민연대의 물결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들(facts)에 기초해 보이지 않는 진실과 인과관계를 찾아 들어가는 『세월호, 그 날의 기록』(2016)은 전문가의 과학을 넘어 시민참여의 과학이 사회 중심의 정의 수립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16의 기억을 재현하고 그 사회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문화예술계의 노력은 물론,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다시 봄이올 거예요』(2016) 등 유가족과 생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복원하기 위한 작가들의 고투는, 공감의 윤리가 타자의 고통과의 지속적인 대면을 통해 수행되는 변증법적 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4·16 운동은 공공 기억(public memory)을 통한 책임의 연대와 커뮤니케이션의 경로를 생성함으로써, ‘사회를 위한 과학’의 가능성 또한 열어놓고 있다. 이를 통해 형성되는 연대는 비인칭적이고 추상적인 연대가 아닌 ‘얼굴이 보이는’ 대면적 연대, 사회적 공간의 분리를 저지하는 일상적 연대의 기반이 됨으로서 시민들이 저마다 생각해왔던 문제를 ‘공통의 문제’로 정의해 가는 담론 과정을 촉발한다.

결국 시민사회에서 자라난 자생적인 사회과학은 사건과 사람, 그 관계를 둘러싼 진실을 공동체에 전달하고 재현하는 ‘매개자’, 즉 수행 집단의 교량적 역할이 세월호 이후 인문사회과학에 새로운 과제로 제기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김명희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사회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