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9:50 (금)
자연과학자의 인문학
자연과학자의 인문학
  • 김치경 충북대 명예교수·미생물학
  • 승인 2016.04.25 15: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로칼럼] 김치경 충북대 명예교수·미생물학
▲ 김치경 명예교수

몇 년 전 미국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는 첨단 스마트폰을 소개하면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강조했었다. 이제는 새로운 과학기술 제품이라도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디자인과 스펙이 가미돼야 상품가치가 있다는 얘기이다.

그 후 우리나라 산업계에서는 갑자기 임원들을 상대로 인문학과 예술 전공자들의 특강이 유행처럼 시행됐다. 요즘도 그러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이 나쁘다기보다는 특강 몇 번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고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학생들을 문과와 이과로 나눠 교육시켜왔다. 그리고 공교육뿐 아니라 극성을 부리는 사교육까지 오직 암기를 반복하는 점수위주의 입시공부에만 몰두해 왔다. 게다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다고 입시과목들을 대폭 줄여줬다.

가난하고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는 그러한 대학교육의 효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이제 국민소득 3만 불이 된 오늘날에는 경제발전도 한계에 이르러 일자리 찾기가 어렵고 일상생활에서의 짜증과 불만을 다스리지 못해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자본주의의 병폐이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암기위주의 교육을 받은 우리들이 급속히 변화하는 외부환경에 대한 대응능력이 부족하고 ‘빨리빨리 문화’에만 익숙해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서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경직된 교육을 받으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미생물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정년을 했다. 재직 중에는 나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쳤고 국제적인 수준의 논문을 내어 해외과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하면서 생명과학자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교수는 만 65세의 나이로 실험실과 연구원들은 모두 끊어지게 된다. 그렇게 실업자 자유인이 된 허울 좋은 명예교수들에겐 마음속에 잠재돼 있던 비전공분야의 소망과 욕구가 꿈틀거리게 된다.

나는 정년퇴임 후 중국 연변과기대에 가서 교육봉사를 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재능기부를 한다는 것은 큰 보람이고 기쁨이었다. 그리고 주말의 여가시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유적들을 찾아다녔는데, 그 희열과 자족감은 연구의 보람에 못지않았다. 나는 그때에 인문학의 매력을 느꼈다. 인문학을 통상 문·사·철이라고 한다. 현장에 찾아가서 확인하는 역사사건과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는 나의 잠재 욕구를 자극시켜줬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찾아보는 인문학 책들은 내 전공분야의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생각과 꿈의 열쇠가 됐던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지도교수가 Ph.D. 즉 Doctor of Philosophy의 의미를 일러줬다. 서양에서는 인문학뿐 아니라 사회 및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의 최고학위는 Ph.D.이다. 그 학위는 지식만이 아니라 그 학문의 철학적 의미를 터득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D.Sc.(Doctor of Science)와 다른 Ph.D.를 우리나라에서는 이학박사라고 표기한다. 심지어 Ph.D.는 철학박사이지 자연과학을 공부한 박사가 아니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과 철학과 인문정신의 융합의미를 인식하게 됐다는 것은 다행한 일인데, 전문학자의 강의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문·이과의 구분 없이 전인교육을 실행할 때, 국민들은 위기극복의 지혜를 터득해 균형 잡힌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고 국가사회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좋아하는 시 몇 수를 유창하게 읊을 줄 알고 악기도 하나 멋있게 연주할 수 있는 인문감각을 갖춘 자연과학자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본다.

김치경  충북대 명예교수·미생물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