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2-09-28 20:19 (수)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정치이론가가 되고 싶습니다”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정치이론가가 되고 싶습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4.21 17:1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저자를 주목한다_ 『세계 정의와 연속적 구성주의』(에코리브르 刊) 내놓은 연세대 2학년 정준혁 씨

“아무리 국제 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훌륭한 제도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국제 관계에서 행위자들이 그것을 자신의 이익 추구용 도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본래 형성 의도와 다른 목적을 위해 기능할 것이다. 또 앞으로도 다수가 세계 정치에서 도덕을 논하는 데 회의적이라면, 이러한 그들의 사고 자체가 도덕성을 실현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고 공고화하는 데 지속적으로 막대한 기여를 하리라 생각된다.”

봄볕이 따사로운 지난 21일(목) 연세대 교정,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이 대학 정치외교학과 2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정준혁 씨를 만났다. 아직 앳된 모습이 채 가시지 않은 풋풋한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어떤 단계를 훌쩍 건너뛴 것처럼 보였다. 『세계 정의와 연속적 구성주의』의 저자가 그다. 이 책은 그가 신입생이던 작년에 집필해 올해 영국과 한국에서 동시 출간했다. 케임브리지 스콜라스 출판사에서 올 3월 Global Justice and Consecutive Constructivism: A Political Theory in the Age of Global Environmental Crisis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한번 책의 주제를 완전히 바꿨는데, 이로 인해서 논리를 정교화하고 내용을 보충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고등학교(이대부고)때만 하더라도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나 황사와 같은 초국경적 환경문제자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그런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국제 정책 마련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국제정치학이나 환경 외교 관련 전공서적들을 탐독하고 정리하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엔에서 개최하는 UNFCCC 등 환경 관련 국제 레짐의 동향과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했다.

고교때부터 국제정치학·환경외교 관련 공부
그의 이런 공부와 조사는 영문 논문 한 편으로 이어졌다. 「Sustaining Cooperation in the International Climate Change Regimes: Employing Game Theory  and Network Theory」였다. 게임이론과 네트워크이론을 통해 국제 기후변화 레짐 내부 및 외부 행위자들 간 관계를 분석하고 레짐 내에서 국가 간 협력을 증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밝힌 논문이다. “저는 기후변화 레짐 내부에 이해관계에 따라 각 국가 간 연합들이 형성되며, 이들 간의 게임 구조는 ‘죄수의 딜레마’ 형태를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구조는 게임의 참여자가 어떤 전략을 취하더라도 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게임의 구조 자체를 ‘사슴 사냥’의 형태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죄수의 딜레마’ 대신 ‘사슴 사냥’의 형태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대목이나, 한국과 같은 중견국이 다른 목적성을 지닌 행위자들 간의 중재를 수행할 수 있다고 제안한 부분은 신선하고 놀랍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논리를 모색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유와 고민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 논문을 메일에 첨부해 로버트 코헤인 프린스턴대 교수와 로렌스 서스킨드 MIT 교수에게 보냈다. 당돌한 행동이라기보다 지의 탐색을 서슴지 않는 용기였다. “채 하루가 지나가기도 전에 두 분 교수님께서 답변을 주셨습니다. 교수님들께서는 제가 쓴 논문이 매우 흥미롭고 게임이론과 네트워크이론을 접목해 간학문적 연구를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칭찬하시면서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해주셨습니다. 또 이 논문 한 편에서 끝내지 말고 학문의 길로 쭉 나아가라는 격려와 조언의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의 논문은 2014년 독일 스프링거 출판사에서 출판한 Handbook of Climate Change Adaptation에 수록됐다. 이를 계기로 정준혁은 두 교수의 조언대로 계속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학문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세계 정의와 연속적 구성주의』는 이런 결심에서 빚어졌다.
“학문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국제정치학과 환경외교와 관련된 자료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기후변화를 억제하기 위해 실효성 있는 정책적 제안들이 세계무대에서 오로지 강대국과 약소국의 이해관계, 힘의 논리에 따라 폐기되고, 인준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제안한 ‘온실가스 감축 활동 등록부(NAMA Registry)’와 같은 합리적인 중재안도 공론화 되지 못한 채 총회에서 거부됐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자신의 탐구에 회의를 갖게 만든 사건이됐다. 올바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제도를 제 아무리 훌륭하게 설계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 국가 행위자들에 의해 그것이 채택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행위자의 인식전환이 일어나서 자발적으로 정의로운 제도를 따를 때에만 그러한 제도들이 실효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그는 ‘규범적 이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국제정치학에서 ‘정치이론’으로 눈길을 돌렸다.

풋풋한 청년의 얼굴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정치이론 선택을 앞두고 굉장히 고민해야 했다. 한국 인문사회학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담한 처우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학문적 전환을 상당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문사회학계 학자의 길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파악하고 있는 그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방편으로 책을 쓰는 것을 선택했다. 『세계 정의와 연속적 구성주의』는 이렇게 해서 그의 학문세계 진입 신호탄이 됐다.
정준혁 씨는 다섯 살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TEPS 점수도 900점이 넘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어 공부’에 어떤 자부심도,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수치로 매겨진 성적들은 부질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반복된 기계적 훈련’을 통해 익힌 ‘문제 잘 푸는 기술’이 제가 책을 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문이 듭니다. 물론 원서를 이해하고 요약하기 위한 기본기를 갖추는 데 이와 같은 공부가 일정 부분 기여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사유의 폭과 깊이’를 좁히는 것도 있다고 봅니다.”

『세계 정의와 연속적 구성주의』를 펼쳐본 독자라면 금방 짐작하겠지만, 그의 문장이나 표현은 정밀하고 투명하다. 영어식 문투와 비문이 즐비한 ‘저술’과 거리가 멀다. 이것은 고교때 은사인 염산국 국어교사의 영향이 크다. 고교 1학년 때 염 교사를 만난 이후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그는 매일 교무실에 가서 염 교사와 과제에 대해 토론하고, 첨삭과 지도를 받았다. 2학년이 되고서부터는 염 교사는 그에게 『리바이어던』, 『사회계약론』,  『자유론』 등과 같은 정치학 고전을 읽고 정리한 후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과제를 내줬다. 『도덕경』,  『침묵의 봄』과 같은 서적들도 이 무렵 읽어냈다. “선생님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면서, 논리를 순발력 있게 전개하고 그것을 미묘하게 정교화 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익혔습니다. 또 정치학의 고전들과 선생님께서 선정하신 기타 고전들을 읽으면서 저의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이전에 비해 좀 더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특별한 지도가, 제가 논문을 쓰고 책을 집필할 수 있도록 해준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자 기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참된 교육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책에는 노직, 왈츠, 싱어, 모겐소 등 다양한 서구 정치사상가들이 등장한다. 고교 때부터 학습한 경험이 작용한 부분이다. 그가 정치이론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가장 큰 관심과 애착을 느낀 것은 바로 서구 자유주의였다. 그래서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거장인 존 롤스의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와 논쟁을 벌였거나 그의 이론을 계승해 상이한 이론 체계를 발전시킨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의 책들을 읽어냈다. 하버마스, 테일러, 아이리스 영 등의 사상에도 눈을 띄워 나갔다. “현재로서는 앤서니 기든스와 피에르 부르디외 등 사회이론가들의 논의를 차용해 독창적인 구조적 부정의 이론을 제시한 아이리스 영의 사상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사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구조적 정의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 위해 기든스와 부르디외 등 후기구조주의적 사회이론, 그리고 세일라 밴하비브와 낸시 프레이저 등 영미 비판이론가들의 저작들을 중점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학기에 13~15권 정도 원서를 스스로 선정해 읽어내고 있다. 이번 학기 그가 읽어야할 책 목록에는 Critique, Norm, and Utopia(세일라 밴하비브), Responsibility for Justice(아이리스 매리언 영), Central Problems in Social Theory(앤서니 기든스), Scales of Justice: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balizing World(낸시 프레이저), Political as Usual(토마스 포거) 등이 올라 있었다. 5월부터는 정치이론을 전공한 김만권 박사와 함께 플라톤 등 서양고전 정치사상가들을 읽어나갈 계획이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교수가 되라는 말을 자주 하는 모양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귀띔한다.

한 학기에 원서 15권 독파하면서 공부
“제 장래희망은 근본적으로 교수가 아니라 학자이고 정치이론가라는 것입니다. 부르디외가 그의 교수취임강연에서 언급했듯, 교수라는 직위는 기본적으로 학문적 업적이 동료들에 의해 인정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직함입니다. 교수 직위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학문적 권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이에  교수를 장래희망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면, 저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학문적 권위의 담지자로서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 경우, 공부의 핵심은 학문 그 자체에서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권위로 옮아갑니다. 저는 권위를 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회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또 즐겁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학자’, 즉 배우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리고 사회의 정치적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는 정치이론가이고 싶습니다.”

그의 지적 관심은 아이리스 영의 정의론을 참조해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논변을 보다 정교화 하고 사회구조와 정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모색하는 데 집중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정의와 연속적 구성주의』 밑바탕에는 세계시민주의와 구조적 부정의라는 두 쟁점에 관련된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려는 지적 분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돌아가는 그의 등 뒤로 4월의 눈부신 햇살이 가득 내려앉고 있었다. 그의 다음 책을 기다려본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연바 2016-05-13 18:45:29
정준혁 학우와 같은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 역시 구성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석사 진학의 목표를 꿈꿔왔지만, 학부생이 저작을 단행본의 형태로 그것도 캠브릿지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정준혁 학우는 이태동 교수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영하 2016-04-22 16:21:06
분야는 다르지만 학자로서 학문다운 학문을 하려는 젊은이를 보는 기쁨이 매우 큽니다. 조선시대 이래로 내려오는 (사대적) 학문적 인프라가 아닌 서구 학문적 전통을 잇는 비판적 학문적 인프라가 정준혁 같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기를 기대합니다. 걱정도 잇습니다. 젊은이의 정열이 정치이론과 현실의 괴리 앞에 좌절할 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