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 파괴와 변형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다시 말해, 변화와 함께 수반되는 현재의 분투와 갈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방법일 것이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우리는 대부분 문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문의 시간은 달리 말해 過程으로의 시간이라 할 수 있고, 문을 거쳐 진입한 새로운 방에서 새로운 창을 통해 목격되는 시간은 境地로서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은 일종의 視界다. 그것은 나타나고 보여주며 흩어진다. 우리가 창 앞에 설 때 사시의 순환과 만물의 변화를 목격하듯, 인간은 시간을 외물의 변화로 인지한다. 이 窓에 맺히는 像은 덧없다. 『詩經』 「黍離」편의 시인은 망국의 옛터에 수북해진 기장을 보고 지난 날 왕조를 회억한다. “저기 늘어진 기장, 저기 싹이 난 기장, 비틀비틀 가는 길, 울렁울렁 마음 속, 나를 아는 이는 내가 무엇을 걱정한다 하고, 나를 모르는 이는 무엇을 찾고 있다 하네. 아득한 하늘이여, 이 어떤 사람인가?”
어제의 화려했던 궁성이 오늘은 기장으로 다옥하다. 不仁한 시간을 마주한 인간의 시선은 그저 하늘을 향할 뿐이다. 공자는 흐르는 물 앞에 서 탄식한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할 것 없이!” 창밖의 시간은 인간 의지와 무관하다. 커튼을 치고 눈을 질끈 감아도 창밖의 사건은 하릴없다.
모종의 시각으로 모종의 사건을 목격하는 ‘때’, 이를 窓의 시간이라 이름하고, 일종의 현상계로 현존하는 지금 여기의 시간을 하나의 방에 비유해본다. 감관을 통해 변화하는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방 안의 일이다. 창밖의 세계에서 일출과 일몰이 반복되듯, 창을 통해 투영되는 인간의 시간도 빛과 어두움을 드리운다. 허나 인간은 하나의 방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며 창밖을 의심하기 일쑤니, 더 나은 때를 바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능이요, 더 나은 세계로의 이행은 인간 역사의 발전이다. 더 나은 때와 더 나은 세계가 앞으로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방에 안주할 수 없고, 이 방과 저 방을 잇는 문을 내야한다.
다른 방으로 옮겨가기 위해 통과하는 이‘때’를, 門의 시간이라 이름해본다. 이 문을 내는 주체는 개인일 수도 있고, 둘 이상의 사회나 국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회 속의 제도나 관습이 낸 문을 통해 다른 방으로 진입한다. 제도와 관습의 문을 통해 거치는 시간은 사회화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바, 종종 그 문을 부수는 행위는 문을 변형시키고 목적하는 방의 구조에 변화를 준다.
우리는 이러한 파괴적 혹은 개변적 행위를 국가나 사회에 대해서는 혁명이나 개혁, 개인에 한해서는 탈선이나 방기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어떤 변혁이나 이탈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듯, 문의 파괴와 변형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다시 말해, 변화와 함께 수반되는 현재의 분투와 갈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방법일 것이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우리는 대부분 문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문의 시간은 달리 말해 過程으로의 시간이라 할 수 있고, 문을 거쳐 진입한 새로운 방에서 새로운 창을 통해 목격되는 시간은 境地로서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삶 속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는 불안하며 과도기적 양상을 띤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자 애쓰면서도 완벽한 ‘멈춤’을 바란다. 이 멈춤의 정점을 일종의 경지로 이해한다면, 지금 이 순간도 저 고지로 향하는 인내와 단련의 시간이다.
창 앞의 세계는 배반적이다. 수많은 문의 시간을 거쳐 다다랐지만 창 앞에 펼쳐진 세계가 종종 목적하던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씁쓸한 자조와 함께 절감하곤 한다. 창 앞의 시간은 찰나적이다. 오랜 시간 묵묵히 발만 보고 오른 산행은 정상에서 얻는 순간의 희열로 온전히 위로받을 수 있는가. 그 어느 날카로운 삶의 끝에서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극점은 머무를 만한 자리라기보다 비로소 떠나야함을 통감하는 자리라고. 蘇軾은 「觀潮」라는 시에서 이처럼 읊었다. “여산의 안개비 절강의 조수, 가보지 못해 이 마음의 풀 수 없는 한으로 남았었네. 이제 직접 가서 보니 본래 별 것도 아닌 것을, 그저 여산의 안개비고 절강의 조수였네.” 기대했던 세계와 실제 세계가 조우할 때, 창 앞의 시간은 조각난다. 소문으로 듣고 마음으로 바라왔던 廬山과 錢塘의 조수를 직접 가보지 못해 안달하던 동파가 직접 그 풍경을 보고서는 기대했던 환상이 깨지는 심경의 변화는 어쩌면 우리가 고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창 앞의 헛헛함이다.
헛헛함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창을 부순다. 유한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몸은 무한의 시간을 동경한다. 그리고 이는 때때로 영생이나 불로라는 욕망으로 왜곡돼 드러난다. 시황제가 꿈꾼 불로불사가 그러했고, 한무제의 承露盤이 그러했으며, 또 唐代 신선술의 성행이 그러했다. 노자는 말한다, “하려는 자는 패하고, 잡으려는 자는 잃는다. 때문에 성인은 無爲하여 패하지 않고 無執하여 잃지 않는다.” 무위가 아닌 유위의 극치는 파괴적 형태로 둔갑했고, 그것은 창을 깨고 시간을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자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 발해만 근처에 위치한 秦皇島에서는 종종 바다 위에 연출되는 신기루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연인들에게 신기루는 기껏해야 사랑과 결속에 관한 반면교사이겠지만, 2천여 년 전 황제에게 신기루는 영생의 욕망을 세울 수 있는 자리였다. 『史記』 「封禪書」에는 신선이 산다는 동해의 三神山을 멀리서 보면 흰구름 같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물 밑에 있는 것도 같으며, 배로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묘사했다.
방사들이 목격하고 사마천이 기록했던 삼신산이 과연 바다 위에 건듯 비친 신기루였는지는 모르지만, 창의 시간은 영생을 기탁하기에는 너무 짧고 초조하다. 전국을 통일한 후로 시황제의 궤적은 불로초를 얻기 위한 巡遊에 초점이 맞춰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의 통일은 그에게 실질적 영토의 지배라는 지배욕을 충족 시켰지만, 시간과의 불화는 당장 내일이라는 시간조차 다스릴 수 없다는 허무와 치욕을 안겼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지 못했던 황제의 뒷모습은 얼마나 추한가. 화려했던 황제의 꿈은 신기루에서 일어나 沙丘에서 무너졌고, 만세를 누리고자 했던 제국의 시간도 고작 2세에 그쳤다. 불로초를 구할 수 없다는 좌절은 직접 불사의 약을 제조하려는 생각의 전환으로 이어졌고, 당나라에 이르러 신선술이 성행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백거이는 시 「思舊」에서 당시 신선술과 단약에 빠져 亡身한 옛 친구들을 회상한다. “한가한 날 옛날을 생각하니 옛 친구들 눈앞에 있는 듯하네. 다시 생각하노니 지금은 어디에 있나, 쓸쓸히 저승으로 갔구나. 한유는 유황을 먹고 병에 걸려 낫지 못했고, 원진은 추석을 정련해 먹고는 늙기도 전에 세상을 떴네. 두목은 단약을 제조하는 법을 알고 육식을 끊었으며(……) 오직 이 몸만 단약 먹지 않아 오히려 늙은 목숨을 부지했네.”
후에 단약의 복용이 끼치는 부작용을 해결하려 내단법이 성행하게 되고 이는 벽곡이나 생식 등 음식에 관련한 섭생법과 복기나 태식 같은 호흡법으로 발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창을 부수려는 도전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현대의학이 말하는 생명연장의 가능성은 일종의 검증받은 과학적 외단법이라 볼 수 있고, 요가나 명상 등의 수련은 내단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종교와 구원 그리고 신앙심은 때로 황제의 그것보다 간절함을 확인한다.
반대로, 문을 잃으면 우리는 방 안에 갇힌다. 문의 시간이 사라지면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창의 시간, 즉 일정한 경지와 동화된다. 도전과 과정이 사라진 상태는 퍽 안정적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안정’은 때로 동경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지와 무관하게 문을 잃게 되는 경우를 일러 요절이나 단명이라 하고, 그 대상이 누리는 창의 시간, 즉 다다른 경지가 불완전하고 미완일수록 죽음은 미화된다. 안회의 요절은 孔門의 恨이지만, 안회의 죽음 없이 유가는 유가다울 수 없다. 仁의 실천이 안회에 의해 계승되고 완벽한 군자상으로 현실화됐다면, 仁의 의미는 오히려 반감되고 만다. 仁의 미완이야말로 유가를 이끄는 원동력이 됐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리석은 증삼에 의해 발양되고 자사와 맹자로 이어지면서 미완된 仁을 완성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회 개인에게 있어 요절은 비운이지만, 仁의 ‘불완전한 안정’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안회는 죽음은 시기적절하다.
문은 없어졌고 창에는 가장 순수하고 고매한 시간만이 남았다. 사실 이러한 요절과 동경에 관련한 담론은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를 기리는 일종의 哀詞일 수 있다. 韓非의 죽음이 그의 법가설을 입증했고, 李賀는 요절했기에 타성에 젖지 않은 시의 이채로움을 간직할 수 있었으며, 윤동주는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기형도는 쓸쓸한 방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내용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