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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연구 모임’이 길어올린 사상가 31명의 핵심주장
‘자율적 연구 모임’이 길어올린 사상가 31명의 핵심주장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4.06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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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_ 사회비판총서 ‘테제시리즈’ 4부작 완결

 버틀러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조차도 권력 담론의 일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성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주의 이론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4권 7장, 고지현)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이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사월의책 刊)을 내놓음으로써 사회비판총서를 표방한 ‘테제시리즈’ 4부작이 드디어 완간됐다. 6년에 걸친 지적 탐색 작업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테제시리즈로 그동안 간행된 책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2012), 『포스트모던의 테제들』(2012), 『현대정치철학의 테제들』(2014) 등이다.

테제시리즈를 기획한 문성훈 서울여대 교수(현대철학)는 이 시리즈를 간행하게 된 의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현대사회비판과 대안모색이라는 관점 하에서, 그러나 특정한 이론적 편향 없이 다양한 현대 사회정치 사상가들의 이론을 집대성하고,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사회를 상상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현대 사회정치 사강가들의 이론 집대성’,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이들에게 이론적 자양분 제공’이라는 슬로건이 눈에 쏙 들어온다.
우리말사전은 이 ‘테제’를 가리켜 “정치적·사회적 운동의 기본 방침이 되는 강령”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테제시리즈는 ‘정치사회적 운동의 기본 방침이 되는 강령을 함축한 이론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기치 하에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은 6년에 걸쳐 연인원 31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해 모두 31명의 현대 사회정치 사상가들의 이론을 집대성해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프롬, 하버마스, 악셀 호네트(이상 1권), 카스토리아디스, 들뢰즈, 푸코, 데리다, 네그리, 바디우, 아감벤, 지젝(이상 2권), 롤즈, 매킨타이어, 로티, 테일러, 샌델, 왈저, 노직, 프레이저(이상 3권), 시몬 드 보부아르, 뤼스 이리가레, 샌드라 하딩, 캘롤 길리건, 엘렌 식수, 아이리스 매리언 영, 주디스 버틀러, 깁슨-그레이엄(이상 4권) 등이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호명돼 모국어로 탐색됐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현대 사회정치 사상가들을 간결하게 훑어낸 기획이다. 유럽사회의 ‘진보의 역설’에 대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적 성찰을 돌아보면서,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모순된 현실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들의 테제(주장)들이 현대사회는 비판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다. 이 질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유용한 참조점이 돼준다는 점이다.
앞의 책과 같은 해 출간된  『포스트모던의 테제들』은 유럽사회의 ‘삶의 정치’와 ‘정치의 귀환’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성찰을 돌아보며, 이를 한국사회에 투사하는 기획이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제기한 포스트모던 테제들이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어떤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서 ‘급진적 정치철학’의 가능성을 읽어낸 저자들은 희망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희망을 말하고, 파국의 시대에서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한다.

앞의 두 책이 독일의 비판이론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그 뒤를 잇는 정치이론을 조명했다면, 3권인 『현대정치철학의 테제들』은 롤즈로부터 시작된 영어권 정치철학자들의 민주적 정의론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역시 국내 학자들의 손으로 현대 서구의 다양한 정치철학적 담론들을 포괄적으로 해설한 데 책의 의미가 있다.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자유지상주의, 실용주의, 비판이론 등 다양한 이론적 노선에 실린 정치철학을 한 눈에 읽어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4권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도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그림이 그려졌던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은 1권을 간행하던 2012년에 이미 “현대사회의 문제를 비판한 여러 사상가들의 핵심 태제를 통해 대안적 사회의 전망을 짚어보며, 동시에 유럽과 영미, 남성과 여성,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토대를 다층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들은 “페미니즘 이슈들을 고려할 때 결국 봉착할 수밖에 없는 첨예한 정치적, 철학적 문제들을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여기서부터 양성평등과 정치적 평등의 문제, 심리학이나 과학과 같은 학분 및 문화 영역에서도 페미니즘적 시각을 적용해야 하는가의 문제, 자본주의 경제와 페미니즘은 양립 가능한가? 라는 질문 등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과제들을 고민해볼 수 있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이런 과제들을 정면으로 다뤄온 현대 페미니즘 사상가들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덟 가지 현대 페미니즘 사상은 페미니즘을 단순한 양성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의 구분을 넘어 모든 차별에 저항하고 다양한 성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려는 태도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다문화, 다인종, 다젠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차이와 인정, 정체성의 개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테제시리즈’가 애초 의도했던 『한국사회에 관한 테제들』까지 확장되지 않고 4권에서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은 앞선 4부작보다 더 많은 문제의식의 탐색과 성찰이 요청되는, 험난한 지의 탐색이어서 다른 과제로 넘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문성훈 교수는 무엇보다 이 연구모임이 ‘새로운 공동연구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에 의의를 매긴다. 우리 학계의 연구 모임은 대체적으로 탄탄한 후원을 등에 업는 제도권 모임과, 일체의 외부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자율적 모임으로 대별할 수 있다. 문 교수가 참여한 연구모임은 후자의 ‘자율적 모임’인 셈이다.
자율적 모임은 자율성을 표방한 장점은 있지만, 고정된 연구 프로젝트 수행이나 외부 연구비 지원이 없다는 점에서 苦戰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외부 지원 없음’이 곧바로 악전고투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구성원 각자에게 자유롭고 개방적인 연구 주제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이론적 자원들이 넘나드는 연구자 플랫폼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요즘 같은 폐색된 ‘정부 관리형 학문장’에서는 어렵더라도 도전해볼 만한 연구모델로 손색이 없다.

그래서 문 교수는 “학문적 전문화가 인접 분야에 대한 소통의 부재와 이에 따른 무지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연구모임은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다. 테제시리즈 역시 이런 모임이었기에 가능했다. 다양한 전공자들이 각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인접 분야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현대 정치사상의 발원지에서 길어 올린 ‘외국 이론가들의 이론 집대성’은 어쩌면 단순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내 연구자들이 모국어로 고민하면서 자기 언어로 이들을 소화해내려고 했다는 점, 이 과정에서 그 흔한 외부 연구비의 유혹 없이 ‘자율적 모임’ 형태로 지적 탐색을 완주했다는 점, 연구자 집단 내부의 긴 대화와 소통의 결과로 ‘테제시리즈’를 마무리했다는 점 등에서 많은 미덕을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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