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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체성도 없는 순수한 차단막, 그것의 비밀은?
어떤 정체성도 없는 순수한 차단막, 그것의 비밀은?
  • 교수신문
  • 승인 2016.04.0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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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실분석_ 복면의 문화정치학

 

▲ 조선령 교수

예능드라마 「복면가왕」의 진짜 에너지는 ‘복면’에 있다. ‘복면’은 실체의 저 너머에 있는 힘까지 짜낸다. 그러나 이 복면은 때로 위협적인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무장테러집단의 복면, 복면을 한 강도……. 부산대 문화예술영상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조선령 교수(사진)가 최근 이와 관련 흥미로운 분석글을 발표했다. 그는 <문화/과학> 85호(2016 봄)에 「복면의 문화정치학」을 선보였다. 조 교수는 이 ‘복면’을 “오늘날 세계를 떠돌고 있는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자주 띄는, 설명하기 어렵고 매우 특이한 이미지의 하나”로 읽어내면서, “복면은 벌거벗은 생명의 반대편에 있는 고전적인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복면은 가면의 안티테제다. 가면이 하나의 페르소나라면 복면은 그 어떠한 정체성도 없는 순수한 차단막 그 자체”라고 분석했다. 그의 지적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복면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면과 달리 정체성 자체를 삭제한다고 언급한 대목이다. 정체성을 삭제하는 순간, 복면은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생산하는 하나의 콘텍스트가 된다. “우리는 복면의 범람이라는 동시대의 현상에서 어떠한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 그는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과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가져와 논의를 전개한다. 그의 글에서 주요 부분을 발췌했다.

복면은 벌거벗은 생명의 반대편에 있는 고전적인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복면은 가면의 안티테제다. 가면이 특정한 정체성을 얼굴에 부여하는 도구라면 사실상 그것은 복면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가면이 하나의 페르소나라면 복면은 그 어떠한 정체성도 없는 순수한 차단막 그 자체다. 가면이 단지 다른 정체성으로 변신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복면은 분리의 작용 그 자체이며 차단의 행위 그 자체다. 복면은 인간의 얼굴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이다.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정체성 자체를 삭제한다.

복면이 가면의 반대라는 사실은 복면이 왜 기 드보르적 의미에서의 스펙터클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기 드로브에 의하면 “분리는 스펙터클의 처음이자 끝이다.”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성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리에 의해 생성됐듯이, 스펙터클(아감벤의 말대로 벤야민적인 전시가치로 환원된 사물들)은 사물과 인간을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생산자는 생산물에서 분리되고 사용은 권리와 분리되고 인간은 그 자신의 삶에서 분리되다. 기 드보르에 따르면, “삶에 대한 시각적 부정이자, 삶에 대한 부정의 가시화”인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개인적 현실은 오직 현재의 자신이 아닌 한에서만 나타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얼굴을 자기 자신(고유한 개성)에서 분리해 추상화시키는 복면의 기능이 스펙터클의 분리 기능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펙터클에서 인간의 소외만을 발견했던 기 드보르에 비해, 아감벤은 극단의 소외 속에서 오히려 정반대의 가능성, 인간의 잠재력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아감벤은 스펙터클에 의해 점령당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없애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펙터클 그 자체에 내재한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약간의 방향전환을 통해 전체 구도를 정반대로 바꾸는 방법이다. 스펙터클은 인간과 사물을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지만, 그 분리된 부분은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일반적인’ 토대로 작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의 가능성 그 자체를 드러내 준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기 드보르가 삶의 부정이라고 생각한 스펙터클의 추상성을 아감벤은 소통 가능성의 단서로 재해석한다.

아감벤은 스펙터클의 ‘방향전환’을 위한 단서로 ‘스페키에스’(라틴어로 외관, 나타남, 겉면 등의 의미를 갖는)라는 단어를 소개한다.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다른 어떤 기체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곁존재’로서의 스페키에스는 “임의의 존재, 다시 말해 자신의 성질들 중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성질들을 일반적이고 무차별적으로 고수하는 그런 존재다.” 이런 특성 때문에 스페키에스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공통의 사용에 탁월하게 내놓을 뿐, 인격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스페키에스적 존재에 대한 아감벤의 설명을 우리는 그대로 복면에 적용할 수 있다. 복면을 씀으로써 우리는 테러리스트도 될 수 있지만, 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무엇도 아닌 존재로 남을 수 있다. 이 구별 불가능성은 아감벤의 논지를 따라가자면 긍정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복면은 장치에 의한 얼굴의 포착이 얼굴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중지시키고 정체성의 문제를 유보시킴으로써 분리의 일반성을 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위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펙터클의 방향전환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감벤이 ‘세속화’라고 부르는 작용에 의해서 가능하다. 세속화는 성스러운 것으로 따로 분리된 것을 인간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것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세속화는 장치를 없애거나 장치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장치의 다른 사용법을 제시함으로써 장치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 다른 사용법은 순수 수단(분리 그 자체, 의사소통 그 자체)의 가시화다.

어나니머스의 복면은 IS의 복면이 제시하는 ‘숭고한 신체의 극장’이라는 스펙터클에 대한 세속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복면은 사실상 익명성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나니머스 그룹 자체가 어떠한 리더도 통일된 조직도 없는, 전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이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개인으로 구성돼 있다. 동영상을 통해 등장하는 그들의 복면은 이 그룹의 구성원들이 철저하게 익명의 존재임을 보여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어나니머스가 될 수 있으며 누구나 가이 폭스 복면을 쓸 수 있다는 ‘보편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어나니머스의 복면은 개성의 상실이 아니라 보편성의 편재를 의미한다.
어나니머스의 복면보다 더 복면의 진실에 가까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메르스를 피하기 위해 평범한 시민들이 쓰고 다녔던 마스크다. 그 마스크는 그 어떤 숭고한 신체도 그 어떠한 페르소나도 심지어 그 어떤 익명성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면은 단지 복면이라는 사실만을 드러낸다. 마스크는 노출과 접촉, 감염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그러한 차단행위를 통해 차단과 분리의 순수형식이라는 복면의 기능을 드러내 준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제2차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가 쓰고 나온 복면을 세속화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자. 메르스 마스크가 무의식적으로 노출했던 복면의 진실을 이날의 복면들은 의식적인 차원에서 제시했던 것은 아닐까. 12월 5일의 복면시위는 ‘타깃으로서의 복면’이라는 개념을 무화시켰다. 모두가 복면을 쓰고 있다면 누가 타깃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폭도의 기호로서의 복면’이라는 개념 역시 무의미함을 보여주었다. 복면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복면의 정체성과 목적을 무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날의 복면은 스펙터클의 ‘세속화’와 연관된 가장 뛰어난 사례는 아닐지라도 매우 의미심장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복면들은 얼굴의 정체성을 ‘제거의 타깃’이나 ‘스펙터클의 도구’에서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장’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시위대의 복면은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겉모습 혹은 이미지의 영역에서 발생하는가를 잘 보여줬다. 스펙터클의 세속화란 이미지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가 우리의 현실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실재적 전투의 장소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복면에 대한 분석은 현실적 삶을 발생시키는 이미지의 기능에 대한 적절한 분석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아감벤의 말을 한 번 더 들어보자. “인간에게 있어서 감춰진 채 있는 것은, 겉모습 뒤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나타난다는 것 자체, 자기 자신이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겉모습 자체를 겉모습으로 끌고 가는 것이 정치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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