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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토양 속 86세대 열망에 응답한 김수행의 ‘번역’
척박한 토양 속 86세대 열망에 응답한 김수행의 ‘번역’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3.30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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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 충남대 교수가 말하는 ‘『자본론』 번역의 내면 풍경’

 

김수행은 “문장을 알기 쉽게, 짧게 쓰고 관계대명사에 의한 수식구가 문장
전체의 의미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면서 “번역작업의 초점을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뒀다고 밝힌 바 있다.

 

▲ 고 김수행 교수 그가 번역한 자본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번역은 우리 학계와 한국사회에 중층적 의미를 제공한다. 정치경제학이란 학문적 축적과 운동을 위한 번역에서 학문을 위한 번역으로의 정착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마르크스 원전 번역은 거슬러 올라가면 조야한 형태이긴 하지만 1921년 무렵까지 조회할 수 있다. 한 연구자에 의하면 1921년 3월과 4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일부가 국내에 최초로 소개됐다(박종린, 「1920년대 초 공산주의 그룹의 맑스주의 수용과 ‘유물사관요령기’」, <역사와현실> 67호, 2008).
그렇다면 『자본론』은 어떤가. 최근 발간된 <마르크스주의 연구> 41호(2016년 봄호 제13권 제1호)에 실린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의 글 「『자본론』 번역의 내면 풍경」이 흥미롭다. ‘특집 21세기 한국에서 『자본론』 읽기: 김수행 선생을 추모하며’에 실린 논문으로, 류 교수는 타계한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번역의 의미를 지식사회학적 맥락에서 검토했다. 류 교수에 따르면 김수행의 『자본론』 번역 출판은 1980년대에 넓은 의미의 ‘86세대’가 주도했던 마르크스 원전의 출간 및 연구 붐의 연장선상에서 그 문제점을 정정하려는 시도였으며, 김수행 자신이 최초의 한글세대로서 젊은 세대에게 말을 걸고 응답하는 소통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류동민은 김수행의 『자본론』 번역은 영어본의 중역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과연 류 교수는 『자본론』 번역에서 어떤 내면 풍경을 성찰했을까. 관련 부분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김수행의 『자본론』 번역이 갖는 사회사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어로 교육받고 사고한 최초의 세대가 번역했다는 점이다. 흔히 김현(1942~1990)을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쓴 최초의 문학세대라고 부른다. 김수행은 김현과 동년배(1942년생)로서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첫 세대에 속한다. 그리고 청년기의 초입에 4·19공간을 경험하고 곧이어 5·16 쿠데타를 거쳐 억압적 군사정권 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표적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박현채(1934~1995)와 비교해보면 김수행의 세대적 특징은 분명하다. 번역의 계기가 서울대 상대 경우회 후배인 비봉출판사 박기봉의 제안으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나름대로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일단 비봉출판사는 대학교재도 출간하는 등 당시의 전형적인 진보적 사회과학출판사는 아니었다. 경우회가 신영복으로부터 이어지며 김수행 역시 그 주요 멤버로서 1968년의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석담으로까지 소급되는 진보적 민족주의의 전통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수행은 오랜 기간을 영국에서 생활했으며, 적어도 1980년대 귀국 이후에는 이념적으로나 생황양식으로나 그러한 전통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청년학생 운동권이 주도한 원전 번역의 흐름이 학계로 넘어왔다는 점이다. 김수행은 런던대학에서 공황이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적인 마르크스 연구자였기 때문에 『자본론』을 번역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자본론』이 금서에서 사실상 해제된 계기 또한 김수행 번역본의 출간이다. 서울대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가 작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자본론』 번역은 마르크스주의 원전이 학술연구의 영역에서 사실상 시민권을 획득하는 중요한 계기들 중의 하나였다. 그 결과 86세대라 불리는 당시의 젊은 세대가 마르크스의 핵심적인 원전에 접근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커진 것이다.

김수행 번역본을 넘어
김수행 스스로 『자본론』 번역철학을 분명하게 요약한 다음 단락을 읽어보자.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썼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제가 번역한 방식은 단어를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서 우리말로 새롭게 쓰는 방식이었어요. 우리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생소한 용어가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만약 독일식 용어를 만들어내서 써버렸다 하면 읽는 독자들은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라요. 우리나라에는 그런 용어가 없으니까요. 결국 저는 그 당시에 우리말로 풀어쓸 수밖에 없었어요.”(김수행·지승호,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시대의창, 2009)
실제로 번역 초기인 1989년 3월 31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김수행은 “문장을 알기 쉽게, 짧게 쓰고 관계대명사에 의한 수식구가 문장 전체의 의미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면서 “번역작업의 초점을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원칙은 개역과정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진 것으로 보이며, 2015년도 개역판 이전까지는 역주도 문헌학적인 것보다는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 가장 악명 높은(?) 예가 화폐단위를 원화로 바꾼 것이다. 이는 사실 번역이라기보다는 번안에 가까운 것이므로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통상의 고전 번역에서 시도하지 않는 이러한 방식은 이를테면 성경에서 ‘빵’을 ‘떡’이라고 번역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의미의 전달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둔 결과일 것이다.
김수행 번역본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비판은 영어판을 텍스트로 삼은 중역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고전 번역으로서는 태생적 한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로부터 곧바로 “그래서 독일어판에 기초한 번역이 유일 정본”이라 주장하거나 ‘정본’의 의미를 둘러싸고 다투는 것은 자칫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마르크스는 괴테 같은 인문학자가 아니라 뉴튼이나 다윈 같은 과학자”(윤소영)라는 입장을 취한다면, 다양한 판본의 비교나 변화과정에 대한 검토, 나아가 최종판본의 확정 등의 훈고학적 작업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전체적으로 김수행의 번역은 해설의 테두리를 엄격하게 지키려는 것이었다. 물론 번역자의 역할을 해설에 국한하더라도 『자본론』처럼 다양한 학제적 지식이 동원되는 책을 번역할 때, 그 정확한 맥락이나 배경을 짚어주는 것 또한 중요한 작업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경제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분야의 전문가들이 집단적 작업을 통해 개선해나갈 필요가 있다.

김수행은 『자본론』 번역에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밀어붙였다. 다양한 대중강의를 통해 『자본론』의 내용을 특히 젊은 세대에게 설명하려 한 노력은 그러한 원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인 내 입장에서 볼 때, 때로는 지나친 단순화가 이뤄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개인적 느낌에 지나지 않지만, 만년으로 갈수록 그가 말을 거는 상대는 전문적 학술연구자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독자대중이었다. 그 시절 86세대와 소통하고자 하던 그의 태도와 방식은 한 세대가 지난 뒤에도 변함이 없었던 셈이다.

한편 두 가지 번역본 사이의 ‘일정한 긴장관계’(김공회)에 대해, 나는 『자본론』 번역과정을 86세대의 집단적 열망과 시도에 대해 김수행이 응답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풀 것을 제안한다. 그 어설프기 짝이 없던 최초의 시도를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공을 과장하지도 않는 자게가 필요하다. 『자본론』은 어차피 전문연구자가 번역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그 전문연구자로서의 역할, 아울러 그 내용을 대중적으로 풀이해 알리는 사회적 역할까지를 충실히 맡아 했던 것이 김수행 번역본이다. 부분적으로는 세 차례에 이르는 개역작업이 이를 분명하게 말해 준다.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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