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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억제돼야 하는가 충족돼야 하는가? 그리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억제돼야 하는가 충족돼야 하는가? 그리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3.22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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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_ 3강. 주경철 서울대 교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지난 19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3강은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였다. 근대 초기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와,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게 과연 유토피아일지 아니면 디스토피아일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주경철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근대 세계가 어떻게 형성됐는가에 관심을 두고 왕성한 저작 활동과 번역 작업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문화로 읽는 세계사』, 『유토피아, 농담과 역설의 이상 사회』,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유토피아』,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전 6권) 등이 있다.
‘근대 세계의 희망과 불안’이란 부제를 단 이번 강연에서 주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앞에 서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그때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다음은 주 교수의 강연에서 발췌한 글이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모 어가 『유토피아』를 쓴 배경에는 에라스무스와의 우정이 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유토피아』와 형제 관계, 어쩌면 쌍생아 관계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런던으로 모어를 찾아갔을 때 모어가 집필을 권유해 나온 책이다. 『우신예찬』은 역설적인 의미로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愚神, 다시 말해서 어리석음 혹은 광기의 여신을 찬미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은 광기의 여신을 찬미하는 책을 썼으니 당신은 지혜의 여신을 찬미하는 책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대화를 이어가던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누스쿠암.’ 아무리 찾아봐도 이 세상에 현명함 혹은 지혜는 없다. 여기서 두 석학의 지적 유희는 이렇게 진척된다.

‘지혜는 아무 데도 없다’가 ‘아무 데도 없는 곳에 지혜가 있다’로 변했다. 결국 지혜로움이 지배하는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가 된다. ‘아무 데도 없는 곳’, 상상의 그 나라를 지칭하기 위해 그들은 나라 혹은 땅을 가리키는 접미사(a)를 붙여 ‘누스쿠아마’라고 불렀다. 이후 라틴어 대신 고대 그리스어로 개명해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이때 쓴 내용이 『유토피아』의 2부가 된다. 그 후 현재 이곳, 우리가 살아가는 흉악한 현실세계, 후대 사람들이 디스토피아라 명명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2부 앞에 붙였으니, 이것이 『유토피아』의 1부다.

토머스 모어와 ‘욕망 억제의 나라’
『유토피아』는 당대 최고 지식인이며 실천적 정치가였던 토머스 모어가 비참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아 자신의 의견을 펼친 책이다. 그가 볼 때 불행의 근본 원인은 탐욕과 자만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는 화폐가 주범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모어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으면 화폐를 없애고, 아예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부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니,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다는 주장이다. 다름 아닌 공산주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모어는 공산주의 사조의 시조인가?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과연 그 해석이 옳을까.

모어가 그리는 이상세계는 결국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사는 곳이다. 유토피아에서는 공동생산·공동분배로 인한 물질적 개선으로 1차 목표를 달성했다고 상정한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주목해 유토피아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모델로 생각했겠지만, 사실 이는 일부 측면에 불과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육체적 쾌락보다 더 소중한 상위의 행복 요인, 곧 정신적 쾌락을 누린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는 그 자체로서 목표가 아니라 더 상위의 목표를 위한 기초이며 기본 전제다. 공동으로 일해서 1차 행복 수단을 얻고, 공동으로 덕성적인 삶을 살아 더 상위의 행복을 누린다. 나 혼자 더 많은 쾌락을 얻으려 하면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우리의 시각으로 관찰해보면 실제로는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도록 교육받고 강제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욕망을 억제하는 나라다.

우리는 『유토피아』 2부에서 묘사한 그 나라가 정말로 이상국가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모어는 한편으로는 이상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무리하게 추구할 때 초래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이고 더 나아가서 “나중에 시간을 내어서 이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은 의견을 나누고 조금 더 자세한 사실들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 주경철 교수

베이컨의 과학기술 유토피아
과연 모어의 권고대로 행복한 사회란 어떤 곳인가, 그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럴 때에 부작용은 없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시간을 내어 깊은 의견을 나누고 자세한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많이 등장했다. 유토피아 ‘장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모어와 비교해볼 만한 근대 초의 작가로 프랜시스 베이컨을 들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아틀란티스』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책은 미완성의 소품이지만 의미는 실로 심대하다. 최초의 과학기술 유토피아가 등장한 것이다. 모어와 비교하기 위해 욕망의 문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어는 지적·정신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베이컨은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것을 왜 굳이 억압하려 하는가. 욕망을 충족시켜줄 가능성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기술의 놀라운 힘이 가능케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어는 ‘욕망 억제’의 유토피아를 그린 반면, 베이컨은 ‘욕망 충족’의 유토피아를 그렸다. 이 작품이 거의 400년 전에 쓰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베이컨의 과학적 상상력은 뛰어나다. 이 책은 서구 문명이 앞서가게 된 중요한 원천 중 하나로 흔히 거론되는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베이컨의 과학 연구는 단지 세속적인 부의 추구만 의미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과학적’ 유토피아라고 하면서도 이야기 구성이 지극히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마치 천지창조 이전 상태에 대한 「창세기」의 서술과 유사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의 아담은 신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져서 타락 이전에는 불멸의 신적 존재라고 해석했고, 바울은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라고 이야기했다. 베이컨은 이러한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가 이상국가로 그린 벤살렘 섬은 곧 제2의 에덴동산이며, 이곳 주민들은 과학 발전에 힘입어 원래 인간이 해야 할 일, 즉 우주 만물을 더 잘 이해하고 지배하는 임무를 해나간다. 루이스 멈퍼드는 베이컨의 과학을 두고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인 기술이라고 파악했다. 베이컨이 생각하는 과학기술의 의미는 하느님의 창조 작업을 인간 스스로 보충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믿음은 상치되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유럽 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허락하는 至福의 상태’(bliss, ‘행복’으로 번역하는 서구의 개념 중 하나)를 저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근미래,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근대 이후 세계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에서 주목할 전환점은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의 핵심 사건은 석탄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이를 증기기관에 이용하는 방식, 즉 기계혁명이다. 제임스 와트는 기계가 노예 노동을 대신해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기계의 등장 이후 노동자들은 공장에 갇혀 기계의 노예가 돼 중노동에 시달렸고, 생활수준은 오히려 비참하게 하락했다. 모든 진보는 해방과 억압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그로부터 200년 후인 오늘날, 인구압과 자원압은 글로벌한 차원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앞에 서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초기 산업혁명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하는 기계를 출현시켰다. 이런 일들은 해방의 기제인가, 아니면 억압의 다른 이름인가?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인간은 새로운 에덴동산에서 새로운 아담으로 거듭날 것인가? 그때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모어가 묻고 베이컨이 새롭게 답하며 또 다른 작가들이 달리 구성한 많은 유토피아 작품이 매번 새롭게 이야기를 하지만, 기본 질문은 여전히 같다. 어떤 것이 행복인가? 사회 전체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절제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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