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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스펙터클에 복무하는 미학을 넘어서려면
과잉 스펙터클에 복무하는 미학을 넘어서려면
  • 교수신문
  • 승인 2016.03.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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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미래 이후의 미학』 나병철 지음|문예출판사|541쪽|30,000원

 절망과의 대면은 또 다른 방식의 고통스런 실재계와의 교섭이거니와, 실재계에
임계한 깊은 어둠 속의 타자는 절망을 껴안는 순간에서만 겨우 소생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지배권력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발화와 잡음의 경계를 설정한다고 논의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분할된 양쪽을 긍정적/부정적 이미지로 구분해 경계를 치안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21세기의 신자유주의는 연예산업과 연성 매체,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를 동원해 그 눈부신 스펙터클의 화려함 속에서 반대편 타자의 영역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과잉 스펙터클 장치는 인문학을 거세시켜 자본의 쪽으로 전이시키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제 인문학은 배제되는 동시에 포섭된다. 미학 역시 거세된 채 포섭되고 있다. 이 인문학과 미학의 위기는 이미 앞서서 ‘배제-포섭된’ 타자가 이제는 더욱더 보이지 않게 된 사실과 중요한 연관이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교섭에 의해 비로소 미래로의 시간이 열림을 강조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성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타자의 출현에 의해 비로소 엄습하는 미래에 사로잡히게 된다. 레비나스의 경우 타자와의 교섭이란 실재계에 접촉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사건과도 같다. 그런 타자를 통한 실재계와의 교섭은 윤리적 공동체와 에로스적 삶으로 향한 미래를 열어주는데, 타자가 사라진 사회는 그 같은 삶으로 가는 미래로의 시간이 닫힌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과잉 스펙터클과 내면의 보형물에 의지해서만 간신히 병리적인 미래의 시간이 나타난다. 우울과 소진증은 그런 화려함과 자유가 극단에 달한 사회가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이다. 이것이 타자가 사라진 사회의 비극이다.
타자가 사라진 사회는 우울과 절망의 사회다. 그러나 그런 우울사회에서의 탈출구는 우울과 절망을 껴안은 사람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미래로의 시간을 열어주는 고통스러운 타자와의 만남이란 실상 제임슨이 ‘역사 그 자체’라고 부른 실재계와의 교섭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타자 대신에 절망을 껴안는다. 절망과의 대면은 또 다른 방식의 고통스런 실재계와의 교섭이거니와, 실재계에 임계한 깊은 어둠 속의 타자는 절망을 껴안는 순간에서만 겨우 소생할 수 있다.

그런 절망과의 포옹은 루쉰이 「고향」에서 보여준 절망 속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루쉰은 격절감의 절망을 통해서 옛 친구이자 ‘마비된 타자’인 룬투와 교섭한다. 룬투와의 심연 속에서의 교섭은 ‘나’의 길을 가는 특이성의 행위자가 절망 속에서 미래에 다가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루쉰의 시대보다 훨씬 더 밝아진 동시에 한층 더 어두워진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역시 루쉰처럼 절망을 통해서만 ‘밝음 때문에 어두워진’ 타자를 만날 수 있다. 어두운 절망을 껴안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빛에 가려진 타자가 소생하며, 길 없는 길을 가는 특이성의 행위자에 의해서만 미래 이후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 저자 나병철은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유혹사회에서의 보이지 않는 정치와 문학’이란 부제를 단 이번 책은 비포(Franco Berardi Bifo)의 『미래 이후』와 루쉰의 소설 「고향」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미학적인 정치’의 부활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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