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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자유’ 천착한 삶과 학문의 고뇌
‘정신적 자유’ 천착한 삶과 학문의 고뇌
  • 교수신문
  • 승인 2016.03.2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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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규범의 일반이론 1·2』 한스 켈젠 지음|김성룡 옮김|아카넷|1권 516쪽 30,000원·2권 349쪽 25,000원

 

▲ 한스 켈젠

“만약 우리가 하나의 일반적 도덕규범은, 어느 누구도 이 일반적 도덕규범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이에 관련된 주체에게는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도덕의 그 자율성은 이러한 제한적인 의미에서도 부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주장하는 한, 우리 스스로 문제되는 일반규범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단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되는 행위를 선한 것으로 혹은 나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1881년 프라하에서 태어나 1973년 버클리 오린다에서 사망한 『순수법 이론(Reine Rechtslehre)』의 저자, 20세기 가장 주목받는 법철학자의 한사람이자 엘리네크와 함께 오스트리아 법실증주의자로 분류되며 하트와 함께 20세기의 법실증주의를 대표했던 한스 켈젠(Hans Kelsen)의 규범 논리에 관한 유작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이 『규범의 일반이론』(전2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583·584권)로 출간됐다.

1960년 한스 켈젠의 나이 78세에 『순수법 이론(Reine Rechtslehre)』 개정판을 출간했을 때 모두들 이것이 켈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정의 켈젠은 1960년대를 규범논리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단편 논문으로 출간하는 데 바쳤다. 1973년 「Delogation」과 「Recht und Logik」에서 켈젠은 규범에 논리학이 적용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그의 오랜 생각을 바꾼다. 이러한 규범 논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순수법 이론을 규범의 일반이론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켈젠이 사망하고 난 후 그의 유작으로 엄청난 양의 규범 논리학에 관한 원고가 발견됐고 『규범의 일반이론(Allgemeine Theorie der Normen)』이라는 이 번역서는 그의 그 유작을 전혀 편집하지 않은 채 출간한 1979년 켈젠재단의 원전을 한국어로 완역한 것이다.

1990년까지 출간된 접근 가능한 켈젠의 저술과 논문 대략 390여 편 중에서 약 100편이 법 이론에 관한 것이고, 켈젠 스스로 자신의 생각의 변화를 그리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디에서 어떤 생각의 변화를 밝혔는지를 세세히 밝혀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유작을 모아 놓은 이 책은 켈젠 규범이론의 마지막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켈젠의 최종적인 규범이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켈젠재단의 관계자들이 강조하듯이 『규범의 일반이론』은 켈젠의 유작에 대해 내용적인 변경이나 수정을 전혀 가하지 않은 것이기에, 일련의 논제를 진행해 가면서 켈젠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변경한 내용들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일 것이다.

『규범의 일반이론』은 총 24만여 단어로 순수법이론 개정판의 약 2배에 달한다. 본문 총 61개의 장, 미주 185개인 원작에서는 모두 200명이 넘는 철학자와 법이론가들이 등장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칸트, 벤담, 카르납, 오스틴, 폰 라이트, 코헨, 클룩, 페를망 등 시대와 분야를 총망라한 거장 등의 관련 사상과 작품들이 언급돼 있고, 규범이론과 관련된 그들의 특정 관점을 발췌·분석하고 있다.
초고를 다듬지 않은 형태이다 보니, 미주 1개가 단편 논문의 분량을 넘어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편으로 저술 당시의 켈젠의 나이와 저술 기간을 고려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저술의 출판여부를 타인에게 판단해달라고 맡긴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적지 않은 부분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거나, 다소 모순으로 느껴지는 내용이 본문과 미주에 병존하고 있고, 참고한 문헌의 판수가 달라지는 등 원고 작성에 소요된 시간의 흔적도 발견된다.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방대함도 인상적이다. 프랑스민법전, 비-유클리드 기하학, 칸트의 논리학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이성, 규범윤리학과 목적론적 윤리학, 의미론, 의무론적 논리학, 자유로운 법 발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주로 독어권의 철학자와 법 이론가들이 등장하지만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불어 등 등장하는 언어도 가히 국제적이다. 물론 그가 참고한 문헌들이 당시를 기준으로도 최신판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의 인식이 최신의 인식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어쩌면 순수법 이론이 출간된 후 40여년에 걸친 켈젠 규범이론의 총체라는 점에서, 그것도 정리되지 않은 원고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규범의 일반이론』의 대부분은 켈젠의 기본적인 관점들이 혼재돼 있고, 기술의 세부화 및 사고의 발전도 발견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규범논리학의 쟁점들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전반부는 전통적인 켈젠학파의 관점이 지배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새로이 발전된 견해들이 정리돼 있다. 규범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게임의 규칙(규범)과 같은 모든 규범의 논리가 다 등장할 것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단지 법과 도덕규범만이 주로 등장한다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다. 법과 도덕이 법률가의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순수법 이론의 확장판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총 61장의 본문은 규범의 본질, 기능, 유형 등의 일반론에서 접근해, 존재와 당위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이론가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분석, 끝으로 규범의 논리학의 핵심주제로 들 수 있는 ‘모순률’과 ‘추론의 원리’가 법과 규범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의 저술의 마지막 문장은 과연 특수한 법적 논리학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일마 타멜로(Illmar Tammelo)를 인용하며 “그런 것은 없다”라고 답한다.
체코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하고, 독일의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1933년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제네바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후 사망할 때까지 ‘정신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방어’라는 자명한 가치는 한스 켈젠의 삶과 학문적 고뇌에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 켈젠이 오랜 시간 천착한 『규범의 일반이론』을 일독해 보는 것은 규범논리에 대한 관심도 연구도 일천한 국내의 학문적 풍토에 다소나마 새로운 인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성룡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필자는 독일 뮌스터대학(WWU M¨unster)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에는 『법적 논증의 기초』, 『법 이론의 쟁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법 수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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