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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서의 미덕과 '그때-거기'라는 기치
공구서의 미덕과 '그때-거기'라는 기치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
  • 승인 2016.03.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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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책은 중국 고전의 방대한 세계를 탐험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여행 장비를 제공하는 기초공구서다. 문헌학의 경험이 부족한 우리에게는 낯선 개념이지만, 공구서란 고적과 고전을 다룸에 있어서 갖춰야 할 필수적인 기술들과 문헌들을 다루면서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경험들을 모아서 정리해 놓은 책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르가논(organon)이라고 부른 것이 이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과 말’을 다룸에 있어서 요청되는 기초 기술과 도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오르가논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정확하게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문헌학에 공구서 개념을 도입하고 본격적으로 공구서들의 개발을 주도한 고전문헌학자는 빌라모비츠(Wilamowitz, 1848-1931)다.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논쟁으로 유명한 이 학자는 공구서의 개발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그때-거기’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여기-지금’의 시간이 아닌 ‘그때-거기’의 시선에서 문헌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그때-거기’로 돌아가는 일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컨대, 2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당시의 말과 개념과 문장들의 의미 구조와 표현 구조를 되살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그때-거기’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은 포기되지 않았고, 그 노력의 결실로 탄생된 것이 ‘고대종합학(Altertumswissenschaft)’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공구서 총서다. 여기에는, 문헌들의 판독과 해독과 해석에 요청되는 “서체, 서지, 필기구, 인쇄기술, 무기, 달력, 종교, 동전, 비문, 자연학, 도량형, 의복, 교육, 문법, 수사학, 정치제도, 관직명, 건축용어” 등, 이른바 문명을 구성하는, 아니 일상의 생활을 복원함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청이 되는 기술들과 정보들을 정리한 공구서들이 포함된다. 물론, 이런 공구서로 ‘그때-거기’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고적과 고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흔하게 범하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이런 공구서들 덕분이다.

여기 책 한 권이 있다.  『고대중국어: 한문학습의 길잡이』,(꿔시량 외 4인 지음, 김혜영 외 4인 옮김, 역락, 2016년)라는 책이다. 이 책은 ‘그때-거기’를 기치로 내 건 책이다. 책은, ‘한문 학습의 길잡이’를 부제를 내걸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책은 단순하게 한문 학습의 길잡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책은 전통적인 한문 학습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서양의 문법 이론을 한문의 통사 구조 설에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그것이다.

한자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말도 시간의 축적물이기에, 시간에 따라 말에 쌓인 문명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 흔적들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품사론을 가지고 한문 통사를 해명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논의와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과연 한문 통사가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전치사, 접속사, 등의 8품사로 설명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적으로, 水는 명사(물)이고 동사(수영하다)다. 이를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들은 “고대 중국어의 품사는 상고시기에 이미 그 기초가 완성됐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고대 중국어의 품사’가 어떤 의미에서의 품사인지가 불분명하다. 어쨌든 내 독법에 따르면, 책에서 주장하는 품사론은 서양의 문법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 통사론에 의거한 품사론은 아닌 것 같고, 의미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자 단어의 역할을 품사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 품사론은 단어의 표기 형태에 의해서 구별된다. 하지만 한자는 서양어처럼 글자 자체가 표기 변화를 하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서양 문법 용어들을 한자와 한문 해설에 함부로 가져다 쓰는 데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형태론의 용어 사용에서도 유사하게 포착된다. 서양 형태론에서 접두사와 접미사는 복합단어의 설명에서 사용되는 형태소다. 한자의 경우, 예를 들면, “‘有’자는 접두사로 고유 명사 앞에 자주 사용 된다”라고 책은 주장한다. 문제는 ‘有’가 서양 문법의 관점에서 볼 때 접두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상론이 요청된다. 각설하고, 동양학과 서양학이 더 가깝게 만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서 발견된다.

끝으로, 이 책은 연구공동체인 ‘學而思’ 모임의 공동 연구의 결실이다. 책은 쉽게 편안하게 읽힌다. 그리고 한자의 역사와 다양한 의미 세계를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에 중국고전문헌학의 현재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기회도 아울러 제공한다. 이 점에서 ‘학이사’ 공부 모임과 이런 학술 서적을 출판해 준 출판사에도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책 자체는 물론 한자와 한문에 새로운 앎도 제공하지만, 앞에서 살폈듯이, 많은 쟁점도 제공한다. 이런 이유에서 공부 모임의 성격이 學而爭으로 바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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