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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대신하는 절대왕권의 상징, 숨겨진 고구려 역사 밝혀주다
태양을 대신하는 절대왕권의 상징, 숨겨진 고구려 역사 밝혀주다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03.15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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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26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 사진①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

세계 곳곳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대왕국의 금관은 12점에 불과하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금관은 1920년대 레너드 울리경이 수메르-우르의 왕릉에서 발굴한 금관으로 기원전 2700년경에 제작된 것이고, 아프카니스탄의 사르마트금관과 틸리아 테베6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이 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금관은 4세기말~5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금관을 포함해 주로 5세기~6세기에 제작된 신라금관이 남아있다. 고구려금관 1점, 신라금관 7점, 가야금관 2점으로 모두 10여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경주의 신라고분 속에 매장됐을 금관까지 생각한다면 세계적인 금관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단발성으로 그친 수메르금관, 아프카니스탄 금관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의 금관은 독자적인 발생과 변천을 이뤄 세계적인 古代金屬工藝의 한 장르를 정립했다.

▲ 사진② 일제강점기 거간인의 명함과 뒷면의 묵서

고구려고분은 石室墳으로 도굴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져서 고구려 멸망이후 근대까지 약 13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훼손돼왔다. 때문에 고구려의 왕릉급 古墳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사례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도굴된 후 간신히 남겨진 遺物마저 구한말~일제강점기의 혼란기에 재차 도굴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제강점기 平安南道 杆城里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진①)의 ‘高句麗火焰文金冠’의 존재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이 금관은 박선희 상명대 교수에 의해 최초로 논문(<백산학보> 제90호, 2011년)에 발표, 소개됐다. 이 논문에는 일제강점기 고미술품 거간꾼인 ‘西原隆成’의 명함 뒷면에 기록된 금관(墨書, 江西郡 普林面 杆城里 金冠)(사진②)과 동반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高句麗 金耳飾 1双(사진③), 金銅遺物(사진④)도 함께 보고돼 있다.
이 高句麗火焰文金冠의 기본형식은 관테에 두 종류의 불꽃무늬 세움 장식 7개를 세워 붙인 전형적인 삼국시대 금관양식으로 1950년대 평양의 청암리절터에서 출토된 高句麗火焰文金銅冠과 같은 모양이다(사진⑤).

▲ 사진③ 동반출토 고구려 금귀고리

금관의 높이는 15.8cm이고 금관 테의 지름은 윗지름이 19cm이며 아래지름이 19.5cm이다. 금관테에는 7옆의 꽃 16과를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고 38개의 달개장식을 달았다. 불꽃무늬의 세움 장식에는 202개의 달개장식을 달아 모두 242개의 달개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 했다. 달개장식은 금관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여서 빛을 여러 방향으로 비치게 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움직임을 표현하게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했다. 금관의 세움 장식인 불꽃무늬는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서기 408년(광개토태왕 18년)에 조성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불꽃무늬 장식과 거의 유사하다. 이 고분벽화의 불꽃무늬는 태양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고대왕국의 태양숭배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내재적인 공통된 신앙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자리 잡았으며, 태양의 불멸사상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공통적인 의식이 작용했다. 고구려 역시 태양의 존재로 영원불멸의 불꽃무늬를 帝王의 금관이나 왕릉의 벽화고분에 벽화문양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태양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물질로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금으로, 절대왕권의 高句麗太王만이 이 금관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사진④ 동반출토 금동유물

35년간 문화재를 연구해온 필자는 이 高句麗火焰文金冠을 직접 實見하고 實測했다. 2009년에 국립 공주대에서 실행한 금관의 XRF성분분석도 주관했다. 금관의 달개장식과 金絲의 성분분석 결과 금 78.55%, 은 19.92%, 구리 1.54% 로 순도 19K의 金版으로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사진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5년 최초로 금관의 XRF성분분석(新羅 瑞鳳冢金冠)을 발표한 것보다 6년 빠르다(서봉총금관의 달개장식도 순도 19K였다). 

▲ 사진⑤ 평양 청암리출토 고구려불꽃무늬금동관
▲ 사진⑥ 고구려금관의 달개장식

이 고구려금관은 金의 성분분석, 세움 장식의 절단기법, 관테와 달개장식의 이음기법, 金絲의 인발기법, 달개장식의 연결방법, 金版에 침착된 유기물과 點線彫技法의 특징 등이 기존 고구려유물의 특성과 동일하며(사진⑦), 함께 출토된 유물로 같이 발표된 금귀고리, 금동마구, 금동못, 금동장신구 등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구려유물과 일치한다.

이 고구려금관은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가야금관처럼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출토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당시의 墨書가 남아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동안 도굴된 고구려고분에 남아있던 금관 잔편만으로 추청만 해오던 고구려금관의 실체가 1천500여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숨겨진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는 유물이며, 특히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이 高句麗火焰文金冠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넘어서고 우리민족과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 사진⑦ 고구려금관의 세움장식과 달개장식(확대부분)

광복 후 1946년에 우리의 손으로 경주 壺衧塚을 최초로 발굴한 이래로 수많은 발굴이 이뤄져서 그동안 잊혀졌던 선현들의 우수한 문화유산들이 속속 밝혀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혼란기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수탈된 수많은 문화재의 행방은 알려진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또한 이 시기의 유물은 대부분이 出土地未詳이지만 국가문화재(國寶, 寶物)로 지정된 유물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아직도 해외에 흩어져서 행방을 모르는 문화재나 국내의 알려지지 않은 중요문화재는 속히 밝혀내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해야 할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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