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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향한 독법의 전환, 이것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이다”
“아픔을 향한 독법의 전환, 이것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3.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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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지음|문학동네|388쪽|14,800원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에 일어난 이 모순과 괴를 직시하게 하고 아름다움이 박탈된 세계의 궁핍을 보게 하는 일이야말로 문학교육의 과제다.

눈 내리는 밤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말할 수 없게 된 시대에 눈과 나무, 비와 숲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작품들을 쓰고 읽고 가르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인가? 아니, 그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나 한가? 산성비와 산성눈이 내리는 시대의 독자가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처럼 행복하게, 딸꾹질 한번 하지 않고 이를테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를 읽으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의 시는 아름답다. 시의 화자는 동짓달 그믐밤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문득 발길을 멈춘다. 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처럼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화자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며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화자는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해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이 평이하고도 아름다운 시는 오늘날 서정적 텍스트로서의 적절성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는 눈 내리는 숲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배제’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과 문학교육이 생태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문학의 본질 영역을 떠난 일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사고의 밑바닥에는 ‘환경문제란 언젠가 해결될 일시적인 문제다.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문학은 무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비디우스의 운문신화집 등 세계문학의 고전들은 예외 없이 역사적 순간에 인간이 대면해야 했던 당대적 모순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그 작품들이 훼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작품들은 당대적 모순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 시대의 당대적 모순들 중의 하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관계다. 문학이 문학의 방법으로 이 모순에 대응하는 것은 문학의 비본질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시대의 시인들은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눈을 겁내고 문학 교사는 텍스트의 부적절성 앞에 고민한다. 별빛 사라진 밤하늘은 아이들에게 가장 ‘흐리멍덩한 것’의 경험적 표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에 일어난 이 모순과 괴를 직시하게 하고 아름다움이 박탈된 세계의 궁핍을 보게 하는 일이야말로 문학교육의 과제다. 오늘날의 문학교육은 불가피하게 궁핍과 박탈, 괴리와 모순에 대한 교육이 돼야 하고, 자연의 고통이 어떻게 인간 자신의 고통이 되는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교육이 돼야 한다. 이 관점에 설 때,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도 다시 그 적절성을 회복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독자에게 그가 잃어버린 세계의 아름다움을 환기시키는 시, 그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시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향한 독법의 전환, 이것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이다.

이 글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으로 교양교육 개편에 몰두했던 우리시대의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가 <녹색평론> 1993년 5-6월호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첫 번째 저작(1994년)에 수록된 글이다. 이번 22주년 개정판은 이 글 외에 22편의 빼어난 문학에세이를 실어, 늦깎이 신예 비평가의 깊은 사유를 새로운 세대에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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