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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조선의 왕립도서관을 찾는가?
누가 조선의 왕립도서관을 찾는가?
  • 고연희 서울대 학술연구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승인 2016.03.14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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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고연희 서울대 학술연구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내가 奎章閣을 처음 찾은 것은 박사논문을 쓰던 1990년대였다. 그 때 규장각은 나에게 조선시대 문인들의 文集을 가장 쉽게 열람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책상이 몇 개 안되는 아담한 열람실에 그나마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한두 분 친절한 사서는 내가 원하는 책을 척척 꺼내줬다. 내가 규장각 소장서적의 가치와 분량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의 실장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곳은 규장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나는 규장각 서적들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正祖가 왕실아카데미 겸 도서관으로 설립하고 정조의 특임을 받은 학자들이 도서목록을 들고 다니며 중국에서 책을 구입해서 만든 곳이다. 책을 구입해오는 우여곡절은 해당 학자들의 기록에 전한다. 高宗대에는 중국에서 출판되는 서적을 대량으로 사들였기에 그 속에는 경전으로부터 수학, 천문학, 혹은 영문과 불문을 포함하는 서적들이 가득했다. 그 당시 서적은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뜻있는 국왕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서적을 사들이는 데 노력과 경비를 아끼지 않았다.

규장각이 구비된 서적들은 그 당시 학자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분량이었으니, 하물며 오늘날의 학자들은 어떻겠는가. 미술사를 전공하는 나에게 특히 관심이 가는 서적은 화보류였다. 책 속의 揷圖 즉 그림은 그 역할이 놀랍다. 세계의 형세에 대해, 사람의 인체에 대해, 단 한 조각의 이미지는 관점을 바꾸고 인식의 범위를 확 넓혀 준다. 현재 규장각에서 제공하는 해제와 책제목만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각정보가 소장돼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기에, 나는 지난해 한국연구재단의 학술교수를 신청하면서 적어도 19세기 수입된 서적의 이미지 정보를 정리해보겠다고 계획했다.
주어진 3년의 연구기간이 길지 않다. 그런데 초조한 마음으로 규장각에 들어설 때마다 매양 느끼는 것은 규장각 자료의 가치에 비해, 여전히 규장각을 찾는 연구자는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규장각을 지키듯 일하고 계신 분들은 규장각 측 사업 하에 낡고 헤어진 자료를 깁고 붙이며 수리하는 분들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종종 규장각 전시관을 단체관람 하는데 우루루 몰려왔다 우루루 몰려나가는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가는지 오히려 궁금하다.

조선의 왕들이 의지로 만들고 채운 도서관을 후인들이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문자문화가 급격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그나마 알량하게 옛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학부시절 한 기업의 장학재단에서 3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사서삼경을 배웠던 기회 덕분이다. 그런 나마저도 쾌쾌한 책만 보는 것은 따분한 짓이라 느껴져서 공부를 접으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지금 옛 자료를 함께 읽고 정리할 수 있는 동료학자가 부족하다. 어린 후배들은 근대 이전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도 한문 해독의 걸림돌에 부딪혀 전공으로 정하기를 망설인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이 우수한 한문해독력을 갖출 수 있도록, 그리고 꾸준히 그 능력을 배양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공교육 프로그램의 개선과 함께 특수프로그램의 생성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전통문화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면 사상누각 같은 미화나 허울로 우리 자신을 왜곡시키게 된다. 옛 것이 훌륭해서만이 아니다. 과거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그 속에서 벌어진 노력과 실수와 소망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할 때 성찰하는 지식사회가 성립된다. 이 분야는 지속적인 인재발굴과 꾸준한 지원과 격려가 없으면 이뤄지지 않는 일이다.

 

고연희 서울대 학술연구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화여대에서 국문학(한국한문학과)과 미술사학(한국회화사)으로 각각 박사를 했다. 『조선시대 산수화』 외 다수의 저술과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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